목차
들어가며
1. 경복궁의 창건
1) 추정배치안
2) 배치원리와 사상
2. 광화문
3. 근정전
4. 사정전
5. 강녕전
6. 교태전과 아미산
7. 경회루
8. 흠경각
9. 사경전
10. 향원정
11. 명성황후 조난지
12. 자선당과 비현각
마치면서
1. 경복궁의 창건
1) 추정배치안
2) 배치원리와 사상
2. 광화문
3. 근정전
4. 사정전
5. 강녕전
6. 교태전과 아미산
7. 경회루
8. 흠경각
9. 사경전
10. 향원정
11. 명성황후 조난지
12. 자선당과 비현각
마치면서
본문내용
에 쓰여졌던 것으로 어진 임금의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궁궐이 왕조 사회의 정치, 문화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과학시설에 대한 관심은 그리 일반화되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복원사업은 조선전기의 과학문화 중심이었던 경복궁의 모습을 그대로 살리고 있어서 집옥재와 이 흠경각이 복원된 것이다.
9. 사경전
흠경각을 나와 동쪽으로 돌아가면 자경전이 나온다. 자전은 왕의 모친이자 선왕(先王)의 비(妃)로 선왕사후에 태비가 된 사람을 가리키는 한편 대비의 처소 곧 대비전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곳은 자비당터(속칭: 趙大妃)로써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에 대왕대비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다. 고종대에 경복궁 중건때이는 청연각자리에 지음으로 청연각은 부속누각으로 처리되었다.
조대비는 1866년까지 자경전에 머무르며 수렴청정했다고 한다. 이런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 라고도 불리는데 「주례고공기」의 삼조(三朝)가 왕을 중심으로 한 궁궐의 기본형식구조임에 대하여 그 동쪽에 왕실 최고 어른인 대비의 거처를 따로 마련한 데서 생겨났다고 한다. 44칸으로 지어진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수 있도록 동남쪽에 다락전과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어서 12칸의 협경당이 부설되어 있고 앞마당에는 돌조각의 다소 거만해 보이는 커다란 해태보습이 보인다. 협경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자경전 십장생굴뚝을 볼 수 있다. 담장읜 한 면을 돌출시켜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으며 굴뚝 벽면의 중앙에는 직사각형 틀 안에 십장생 무늬를 조형적으로 만들어 배치하였다. 그 사이에 회를 바른 형식으로 무늬의 주제는 해, 산, 불, 구름, 바위, 소나무, 거북이, 사슴, 학, 불로초, 포도, 대나무, 국화, 새, 연꽃등이었다. 그 둘레는 학, 나티, 불가사리, 박쥐, 당초무늬등이 새겨져 있다. 십장생은 장수를 의미하고 포도는 자손번성, 나티와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이었다. 또 박쥐는 부귀를 상징한다. 굴뚝 윗 부분 역시 조형적으로 목조건물형태를 모방하였고 꼭대기는 10개의 연가를 올려놓아 연기가 빠지게 하였다. 꽃담장으로서의 조형미도 살려 조선시대 궁궐 굴뚝으로는 최고라고 한다. 궐안 최고의 어른을 모시는 곳이라서 그런지 어디한 곳 그냥 지나치지 않고아름답게 표현해 놓은 듯했다. 굴뚝의 모습에 감격하여 서쪽의 문을 나서면 그림 전시가 돼 있는 착각을 일으키는 낮은 담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각각 직사각형의 틀안에 매화난초, 나비, 천도, 대나무, 국화, 나비 등을 부조 형식으로 만들어 구운 뒤 역시 회를 바른 형식이 있다. 화폭에 담아내는 구도가 적절했고 화면의 생물들이 살아있는 듯했다.
10. 향원정
1867년 고종이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 못을 파서 중앙에 섬을 만들고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라 하고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고 하지만 마루밑 구조까지 따지면 삼층인 셈이다. 또 평면이 육각형이어서 이런 건물로는 유일한 것이고 난간을 외관에 설치하여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이었다. 서쪽으로 올라가서 보니 연못이 반원모양이었고 취향교의 완만한 곡선이 아름다웠다. 이 취향교는 1953년 개조되기 전까지는 향원정의 북쪽에 가설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다리 동쪽으로는 담장을 설치하고 인유문이라는 일각문이 열렸었고 그 남쪽에 봉집문이 있어서 연못을 한층 아늑한 정취로 만들었다고 한다.
11. 명성황후 조난지
향원정 북쪽에는 팔우정과 집옥재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북동쪽으로 명성황후 조난지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치욕적인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을미사변이라면 국사시간에 너무나도 잘 배웠지만 우리나라 궁궐 중 정궁인 경복궁 안에서 친일파의 무리와 일본 무사에 의해 그 시신이 시해당한 후 불태워져서 묻혔다고 하니 정말 비통한 심정이었다.
12. 자선당과 비현각
마지막으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자선당과 비현각에 가보았다. 동궁 일각으로 세종9년에 마련된 곳이다. 세자가 거처하면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공부하던 곳으로 북궐도에 의하면 동궁은 세자가 백관으로부터 조회를 받던 정당인 계조당,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로 쓰던 자선당, 비현각,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강학을 받던 춘방, 세자를 호위하던 군사가 머물던 계방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된 후 1999년에 자선당과 비현각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자선당 주위의 행각은 세자의 시중을 드는 상궁과 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방과 청, 부엌, 문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이 좁고 비교적 검소한 모습이었고, 단청은 매우 화려하였다. 난방과 통풍에 매우 신경을 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쪽문으로 나가니 왕세자의 편전인 비현각이 나왔다. 원래 궁궐 내전 건물은 전후좌우로 툇간을 설치하여 외진과 내진의 이중구조로 구성하는 것이 통례이나 당시 궁궐 건물로서는 드물게 내외진 구분이 없이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고종 4년(1867)에 중건하였고 이곳에서 순종이 마지막으로 세자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우리나라 왕조의 마지막 왕이 이곳에서 세자시절을 보냈다고 하니 씁씁하고 측은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있는 것은 1999년에 복원된 것이다.
마치면서
경복궁을 돌아보면서 조선왕조의 역사를 체험으로 느낄 수 있었다. 궁궐이라하여 매우 규모가 크고 사치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390여 칸에 불과한 소규모였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세종대에 이르러서야 법궁체제와 함께 첨단과학 시설을 갖추어 나간것도 새롭게 알게되었다.
조선 후기의 궁정문화의 유산과 왕조사회의 변화와 고종대의 경복궁 중건까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정궁이자 우리나라 궁궐 건축사의 종장을 장식한 경복궁에 대한 가치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왕조의 본거지라는 뼈아픈 과거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고 이제서야 조금씩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일제 침략기에 파괴되고 왜곡되고 변형되어진 경복궁 복원에 힘쓰고 그 가치를 아는데 힘써야 되겠다.
9. 사경전
흠경각을 나와 동쪽으로 돌아가면 자경전이 나온다. 자전은 왕의 모친이자 선왕(先王)의 비(妃)로 선왕사후에 태비가 된 사람을 가리키는 한편 대비의 처소 곧 대비전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곳은 자비당터(속칭: 趙大妃)로써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에 대왕대비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다. 고종대에 경복궁 중건때이는 청연각자리에 지음으로 청연각은 부속누각으로 처리되었다.
조대비는 1866년까지 자경전에 머무르며 수렴청정했다고 한다. 이런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 라고도 불리는데 「주례고공기」의 삼조(三朝)가 왕을 중심으로 한 궁궐의 기본형식구조임에 대하여 그 동쪽에 왕실 최고 어른인 대비의 거처를 따로 마련한 데서 생겨났다고 한다. 44칸으로 지어진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수 있도록 동남쪽에 다락전과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어서 12칸의 협경당이 부설되어 있고 앞마당에는 돌조각의 다소 거만해 보이는 커다란 해태보습이 보인다. 협경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자경전 십장생굴뚝을 볼 수 있다. 담장읜 한 면을 돌출시켜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으며 굴뚝 벽면의 중앙에는 직사각형 틀 안에 십장생 무늬를 조형적으로 만들어 배치하였다. 그 사이에 회를 바른 형식으로 무늬의 주제는 해, 산, 불, 구름, 바위, 소나무, 거북이, 사슴, 학, 불로초, 포도, 대나무, 국화, 새, 연꽃등이었다. 그 둘레는 학, 나티, 불가사리, 박쥐, 당초무늬등이 새겨져 있다. 십장생은 장수를 의미하고 포도는 자손번성, 나티와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이었다. 또 박쥐는 부귀를 상징한다. 굴뚝 윗 부분 역시 조형적으로 목조건물형태를 모방하였고 꼭대기는 10개의 연가를 올려놓아 연기가 빠지게 하였다. 꽃담장으로서의 조형미도 살려 조선시대 궁궐 굴뚝으로는 최고라고 한다. 궐안 최고의 어른을 모시는 곳이라서 그런지 어디한 곳 그냥 지나치지 않고아름답게 표현해 놓은 듯했다. 굴뚝의 모습에 감격하여 서쪽의 문을 나서면 그림 전시가 돼 있는 착각을 일으키는 낮은 담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각각 직사각형의 틀안에 매화난초, 나비, 천도, 대나무, 국화, 나비 등을 부조 형식으로 만들어 구운 뒤 역시 회를 바른 형식이 있다. 화폭에 담아내는 구도가 적절했고 화면의 생물들이 살아있는 듯했다.
10. 향원정
1867년 고종이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 못을 파서 중앙에 섬을 만들고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라 하고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고 하지만 마루밑 구조까지 따지면 삼층인 셈이다. 또 평면이 육각형이어서 이런 건물로는 유일한 것이고 난간을 외관에 설치하여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이었다. 서쪽으로 올라가서 보니 연못이 반원모양이었고 취향교의 완만한 곡선이 아름다웠다. 이 취향교는 1953년 개조되기 전까지는 향원정의 북쪽에 가설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다리 동쪽으로는 담장을 설치하고 인유문이라는 일각문이 열렸었고 그 남쪽에 봉집문이 있어서 연못을 한층 아늑한 정취로 만들었다고 한다.
11. 명성황후 조난지
향원정 북쪽에는 팔우정과 집옥재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북동쪽으로 명성황후 조난지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치욕적인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을미사변이라면 국사시간에 너무나도 잘 배웠지만 우리나라 궁궐 중 정궁인 경복궁 안에서 친일파의 무리와 일본 무사에 의해 그 시신이 시해당한 후 불태워져서 묻혔다고 하니 정말 비통한 심정이었다.
12. 자선당과 비현각
마지막으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자선당과 비현각에 가보았다. 동궁 일각으로 세종9년에 마련된 곳이다. 세자가 거처하면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공부하던 곳으로 북궐도에 의하면 동궁은 세자가 백관으로부터 조회를 받던 정당인 계조당,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로 쓰던 자선당, 비현각,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강학을 받던 춘방, 세자를 호위하던 군사가 머물던 계방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된 후 1999년에 자선당과 비현각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자선당 주위의 행각은 세자의 시중을 드는 상궁과 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방과 청, 부엌, 문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이 좁고 비교적 검소한 모습이었고, 단청은 매우 화려하였다. 난방과 통풍에 매우 신경을 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쪽문으로 나가니 왕세자의 편전인 비현각이 나왔다. 원래 궁궐 내전 건물은 전후좌우로 툇간을 설치하여 외진과 내진의 이중구조로 구성하는 것이 통례이나 당시 궁궐 건물로서는 드물게 내외진 구분이 없이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고종 4년(1867)에 중건하였고 이곳에서 순종이 마지막으로 세자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우리나라 왕조의 마지막 왕이 이곳에서 세자시절을 보냈다고 하니 씁씁하고 측은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있는 것은 1999년에 복원된 것이다.
마치면서
경복궁을 돌아보면서 조선왕조의 역사를 체험으로 느낄 수 있었다. 궁궐이라하여 매우 규모가 크고 사치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390여 칸에 불과한 소규모였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세종대에 이르러서야 법궁체제와 함께 첨단과학 시설을 갖추어 나간것도 새롭게 알게되었다.
조선 후기의 궁정문화의 유산과 왕조사회의 변화와 고종대의 경복궁 중건까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정궁이자 우리나라 궁궐 건축사의 종장을 장식한 경복궁에 대한 가치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왕조의 본거지라는 뼈아픈 과거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고 이제서야 조금씩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일제 침략기에 파괴되고 왜곡되고 변형되어진 경복궁 복원에 힘쓰고 그 가치를 아는데 힘써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