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문
Ⅱ.본문
1.랑케와 부르크하르트의 비교
2.랑케 사관의 특징
Ⅲ.결론
Ⅱ.본문
1.랑케와 부르크하르트의 비교
2.랑케 사관의 특징
Ⅲ.결론
본문내용
신념은 인간사가 궁극적으로 神意에 연결된다는 것일 뿐이다.
진보 역시 신의 뜻에 따라 무조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라는 자체 또한 하나의 세계주의적 가정에 불과하며 역사적으로 실증될 수 없다고 했다.또한 그의 진보 개념은 각 시대의 동등한 존재이유에 입각해 있다. 진보는 특정시기의 인간정신 운동이 현저한 경향으로 자기표현된 독자적 성격을 띄게 되는 데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므로 시간의 전후가 진보를 좌우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그의 진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그는 물질적인 면에서 직선적인 진보를 인정하였지만 도덕적인 생활 속에서의 진보는 인정될 수 없다고 하면서 각 시대 속에는 다만 하나의 특정하고도 거대한 경향성만 인정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 바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필연성의 문제이다.랑케에 있어서의 역사사실이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사건의 배후에 내재하고 있는 생동하는 힘이 인간정신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인데 이 역사사실은 모든 시대가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역사자체의 연속성과 복합성 속에 있다.이러한 역사사실의 형성내면에서 랑케는 필연성을 보았다. 필연은 자유와 상호투쟁하면서 역사에 침투해 들어오는데 자유란 것은 개인의 생활이 그가 속한 환경에 의존되어있기 때문에 어떤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반면에 모든 위대한 행위는 세계를 항상 양분시키는 보편적인 대립을 공감하는 데에서 일어나며 여기에서 투쟁이 불가피하며 이것이 바로 필연인 것이다.따라서 랑케에 있어서의 필연성이란 역사발전의 생동하는 힘에 지도적이념 또는 경향성에 내재하는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역사는 그 자신의 필연성에 따라서 전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랑케의 일생 최대 목표는 세계사적 종합에 있었다.랑케의 세계사의 구성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첫째로 1852년에서 1868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근대사의 제시기』의 저술에서 전개된 것이다.여기서 그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시각에서 유럽사를 분석하였다.
두번째로 1867년에서 1879년 까지로 프로이센이 통일에 의해서 유럽사의 무대에 등장한다는 관점에서 보편사를 구상했으며 마지막으로 1875년에서 1886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미완성의 『세계사』를 집필했다.그의 『세계사』는 간행 당시부터 학문적 진보에서 낙오되어있다는 평을 받았고 현재에는 거의 읽혀지지 않는 저술이 되었지만 커다란 역사적 종합과 위대한 게획을 표출하는데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랑케가 내세운 역사가의 필수사항 두가지는 하나는 개별적인 것 그 자체에 기쁨을 갖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일반성에 대한 안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의 사실추구도 일반적 특성에 대한 고려없이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역사가는 항상 좀더 높은 차원의 일반화에까지 도달해야하며 내적 연관성을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랑케의 세계사의 범위는 유럽중심의 역사이며, 1492년부터 1789년까지의 유럽사의 주 특징이 근대국가의 형성과 강대국의 대두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랑케는 유럽 강대국의 발전을 역사의 배경에 존재하는 실체의 반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랑케의 전쟁에 대한 평가는 적극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전쟁에 의해서 새로운 역사적 형성력이 생성되고 역사적 발전이 기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전쟁을 만물의 아버지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는 그가 충돌과 긴장이 역사발전의 원리라고 생각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랑케는 유럽근대사의 다양한 양상이 특정의 개별적 사실이나 사건들을 의의있게 만드는 인류사의 정신적 창조행위라 보고 거기에 유럽사라는 단일한 이념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랑케사관이 20세기 독일의 독단적인 정치체제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인데, 마이네케는 국가이성의 역사적 기원을 논하면서 19세기후반 이래로의 독일 통일시대로까지 이르는 문제에 대해서도 랑케사학의 정치적 책임을 물으려 했다. 그것은 랑케가 대외정책과 국가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강력한 정치를 찬성하며 전체적 효율을 위해 개인의 거부감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에 기인한 것이다.그러나 랑케의 관심은 해외팽창보다 세력균형에 있었다는 데에서 제국주의 사가인 Seeley와의 궁극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랑케에 있어서 정치와 역사는 가장 중요한 관심대상이었으며 이는 신의 관념으로 수렴되고 그 속에서 종합되었다.
랑케가 역사가로서 탁월하고 위대했던 점은 역사생활에서의 세부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조화시키면서 역사전개의 깊은 내적인 구조관계를 서술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그에게 있어서의 역사서술은 '사건들의 배후에 숨어있는 원인들을 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철저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역사상 보편적인 움직임을 '본래적으로 생동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이러한 '보편적인 것'은 '역사사건이 일어나는 데 있어서의 일반적인 조건,나아가 한 시대의 흐름 속에 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특수적인 것'은 개별적 사건이나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도 이들이 갖고 있는 개체성· 고유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세계질서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이렇듯 랑케는 역사의 전개를 특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상호관계에서 이해했다.따라서 그는 개별적 사실을 전체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Ⅲ.결론
랑케사학은 개별적인 것에 대한 강조를 그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각국의 문서보존소를 탐색하였으며 세미나를 통해 후진학자들을 양성하였다.
랑케에 있어서 정치발전이란 곧 신의 섭리가 표현된 것이며 역사란 도덕적 운명을 달성하는 국가의 역사이다.그의 사관에 의하면 세상의 실재하는 사물들의 배경에 실체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는 인간에게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발전법칙을 지닌 이데아의 세계라는 것이다.결국 랑케에게 있어서의 역사지식이란 창조적 의지로서의 이데아를 파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역사의 이해는 이데아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랑케는 사실중심적 역사를 실천했지만 동시에 관념론적인 보편사관을 지닌 사학자였던 것이다.
진보 역시 신의 뜻에 따라 무조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라는 자체 또한 하나의 세계주의적 가정에 불과하며 역사적으로 실증될 수 없다고 했다.또한 그의 진보 개념은 각 시대의 동등한 존재이유에 입각해 있다. 진보는 특정시기의 인간정신 운동이 현저한 경향으로 자기표현된 독자적 성격을 띄게 되는 데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므로 시간의 전후가 진보를 좌우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그의 진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그는 물질적인 면에서 직선적인 진보를 인정하였지만 도덕적인 생활 속에서의 진보는 인정될 수 없다고 하면서 각 시대 속에는 다만 하나의 특정하고도 거대한 경향성만 인정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 바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필연성의 문제이다.랑케에 있어서의 역사사실이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사건의 배후에 내재하고 있는 생동하는 힘이 인간정신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인데 이 역사사실은 모든 시대가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역사자체의 연속성과 복합성 속에 있다.이러한 역사사실의 형성내면에서 랑케는 필연성을 보았다. 필연은 자유와 상호투쟁하면서 역사에 침투해 들어오는데 자유란 것은 개인의 생활이 그가 속한 환경에 의존되어있기 때문에 어떤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반면에 모든 위대한 행위는 세계를 항상 양분시키는 보편적인 대립을 공감하는 데에서 일어나며 여기에서 투쟁이 불가피하며 이것이 바로 필연인 것이다.따라서 랑케에 있어서의 필연성이란 역사발전의 생동하는 힘에 지도적이념 또는 경향성에 내재하는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역사는 그 자신의 필연성에 따라서 전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랑케의 일생 최대 목표는 세계사적 종합에 있었다.랑케의 세계사의 구성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첫째로 1852년에서 1868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근대사의 제시기』의 저술에서 전개된 것이다.여기서 그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시각에서 유럽사를 분석하였다.
두번째로 1867년에서 1879년 까지로 프로이센이 통일에 의해서 유럽사의 무대에 등장한다는 관점에서 보편사를 구상했으며 마지막으로 1875년에서 1886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미완성의 『세계사』를 집필했다.그의 『세계사』는 간행 당시부터 학문적 진보에서 낙오되어있다는 평을 받았고 현재에는 거의 읽혀지지 않는 저술이 되었지만 커다란 역사적 종합과 위대한 게획을 표출하는데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랑케가 내세운 역사가의 필수사항 두가지는 하나는 개별적인 것 그 자체에 기쁨을 갖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일반성에 대한 안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의 사실추구도 일반적 특성에 대한 고려없이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역사가는 항상 좀더 높은 차원의 일반화에까지 도달해야하며 내적 연관성을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랑케의 세계사의 범위는 유럽중심의 역사이며, 1492년부터 1789년까지의 유럽사의 주 특징이 근대국가의 형성과 강대국의 대두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랑케는 유럽 강대국의 발전을 역사의 배경에 존재하는 실체의 반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랑케의 전쟁에 대한 평가는 적극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전쟁에 의해서 새로운 역사적 형성력이 생성되고 역사적 발전이 기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전쟁을 만물의 아버지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는 그가 충돌과 긴장이 역사발전의 원리라고 생각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랑케는 유럽근대사의 다양한 양상이 특정의 개별적 사실이나 사건들을 의의있게 만드는 인류사의 정신적 창조행위라 보고 거기에 유럽사라는 단일한 이념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랑케사관이 20세기 독일의 독단적인 정치체제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인데, 마이네케는 국가이성의 역사적 기원을 논하면서 19세기후반 이래로의 독일 통일시대로까지 이르는 문제에 대해서도 랑케사학의 정치적 책임을 물으려 했다. 그것은 랑케가 대외정책과 국가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강력한 정치를 찬성하며 전체적 효율을 위해 개인의 거부감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에 기인한 것이다.그러나 랑케의 관심은 해외팽창보다 세력균형에 있었다는 데에서 제국주의 사가인 Seeley와의 궁극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랑케에 있어서 정치와 역사는 가장 중요한 관심대상이었으며 이는 신의 관념으로 수렴되고 그 속에서 종합되었다.
랑케가 역사가로서 탁월하고 위대했던 점은 역사생활에서의 세부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조화시키면서 역사전개의 깊은 내적인 구조관계를 서술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그에게 있어서의 역사서술은 '사건들의 배후에 숨어있는 원인들을 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철저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역사상 보편적인 움직임을 '본래적으로 생동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이러한 '보편적인 것'은 '역사사건이 일어나는 데 있어서의 일반적인 조건,나아가 한 시대의 흐름 속에 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특수적인 것'은 개별적 사건이나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도 이들이 갖고 있는 개체성· 고유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세계질서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이렇듯 랑케는 역사의 전개를 특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상호관계에서 이해했다.따라서 그는 개별적 사실을 전체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Ⅲ.결론
랑케사학은 개별적인 것에 대한 강조를 그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각국의 문서보존소를 탐색하였으며 세미나를 통해 후진학자들을 양성하였다.
랑케에 있어서 정치발전이란 곧 신의 섭리가 표현된 것이며 역사란 도덕적 운명을 달성하는 국가의 역사이다.그의 사관에 의하면 세상의 실재하는 사물들의 배경에 실체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는 인간에게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발전법칙을 지닌 이데아의 세계라는 것이다.결국 랑케에게 있어서의 역사지식이란 창조적 의지로서의 이데아를 파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역사의 이해는 이데아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랑케는 사실중심적 역사를 실천했지만 동시에 관념론적인 보편사관을 지닌 사학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