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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된 글을 문학의 진면목으로 여기던 시대에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세련되게 표현해 냄으로써 차원 높은 예술언어로 끌어올린데 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담은 작품들이 정서적 공감을 유발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데 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송강에게 위대한 '민족시인'이란 칭홀르 붙여줘도 되지 않을까? 송강만큼 우리말의 특성을 잘 살려서 민족 고유의 정서와 정감의 세계를 다채롭게 형상화한 시인도 드물며 뿐만 아니라 문학의 고유한 특성인 '삶의 진실에 대한 인시과 아름다움에 대한 형상을 언어화 하는것'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은 임진왜란을 보낸후, 동인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 송정촌으로 물러 나와 만년을 지내다가 선조 26년,(1593년)12월 18일에 다사다난 했던 생의 막을 내린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송강의 시신은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 2월 고양군 신원에서 장사를 치르고, 그로부터 70여년후인 1665년 (현종 6년) 우암 송시열의 주선으로 충청북도 진천 관동의 지장산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진천의 묘소 옆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송강사가 건립되어 있다. 이렇듯 정철의 자취는 그의 삶과 죽음을 따라 전남 담양, 경기도 고양, 충북 진천등지에 흩어져있다.
식영정 외에도 송강 정철의 발자국이 남겨 있는 곳은 정철의 호이기도 한 '송강정'이 있다. 하지만 나는 소쇄원을 위시한 지실마을의 가사 문학권만 살펴보았기 때문에 송강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에서는 하지 않았다.
깊어가는 가을 오후, 식영정에서 맛볼 수 있었던 시원한 바람과 물소리, 그리고 송강 정철의 숨결을 결코 잊지 못할 것만 같다. 중간고사 기간 동안에 쌓였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고, 바쁜 생활속에서 잠시 잊고 살았던 여유라는 감정을 가슴 가득 느끼고 돌아 올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자연앞에만 서면 부자이건 가난하건, 못생기건 예쁘건 그 누구도 똑같아져 버리고 만다는 말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분명 내가 살아가고 있는 '광주 광역시'의 가을 바람이나 해질녁 붉게 타올라 물든 저녁 노을이 버스로 40분 거리의 담양에서 불어대는 바람과 저녁노을과 다를바가 없을터인데도 그 느낌이 천차 만별로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아마도 산이 있고 없음의 차이, 강이 있고 없음의 차이, 그리고마음의 평화와 안정, 욕심의 있고 없음의 물질적인 이유때문이 아닐까?
어찌보면 송강 정철은 을사사화라는 당쟁의 희생양으로 나이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담양 창평에 내려옴으로써 수많은 문인들과 만나고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이 그의 문학세계와 생활, 인격형성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우연인 동시에 행복의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만약 그가 그런 어려움과 시련의 과정 없이 태어난 한양에서 그대로 아무 걱정 없이 성장했다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알려질 수 있는 문인이 되었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사람은 어떠한 시련이 있어야만, 고통이 있고 그것을 참고 견뎌내야만 더 큰 나 자신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말처럼 말이다. 이런점에서 송강 정찰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고난을 많은 대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이겨냄으로써 호탕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송강 정철처럼 매사에 올바른 신념과 의지로 내 삶의 발자취를 정말이지 아름답고 호탕하게, 정말이지 '저 녀석 진짜 멋진 놈이다'란 말을 들을 정도로 작은일에 왈가왈부 하지 말고 멋지게 살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호남 시가 문단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전남 담야의 가사 문학권으로의 짧지만 의미심장했던 나의 늦가을여행은 여기서 그 끝을 맺어야 겠다.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등 대학교 1학년때 고전 문학 개론에서 자주 들어왔던 우리 지역의 문학가들의 옛 발자취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만져보고 앉아보고 느껴볼 수 있어서 나는 국문인이라는 하나의 자부심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고등학교때 국어 수업시간중 배우는 내용에서 가사 문학과 시조 문학등의 고전 문학을 가장 좋아했는데 내가 직접 그 문학의 산실처를 찾아가게 되다니...... 아직도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가끔씩 들때가 있다. 내가 직접 송강이 거닐던, 석천 임억령이 거닐던, 하서 김인후가 거닐던 곳을 밟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송강 정철은 임진왜란을 보낸후, 동인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 송정촌으로 물러 나와 만년을 지내다가 선조 26년,(1593년)12월 18일에 다사다난 했던 생의 막을 내린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송강의 시신은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 2월 고양군 신원에서 장사를 치르고, 그로부터 70여년후인 1665년 (현종 6년) 우암 송시열의 주선으로 충청북도 진천 관동의 지장산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진천의 묘소 옆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송강사가 건립되어 있다. 이렇듯 정철의 자취는 그의 삶과 죽음을 따라 전남 담양, 경기도 고양, 충북 진천등지에 흩어져있다.
식영정 외에도 송강 정철의 발자국이 남겨 있는 곳은 정철의 호이기도 한 '송강정'이 있다. 하지만 나는 소쇄원을 위시한 지실마을의 가사 문학권만 살펴보았기 때문에 송강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에서는 하지 않았다.
깊어가는 가을 오후, 식영정에서 맛볼 수 있었던 시원한 바람과 물소리, 그리고 송강 정철의 숨결을 결코 잊지 못할 것만 같다. 중간고사 기간 동안에 쌓였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고, 바쁜 생활속에서 잠시 잊고 살았던 여유라는 감정을 가슴 가득 느끼고 돌아 올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자연앞에만 서면 부자이건 가난하건, 못생기건 예쁘건 그 누구도 똑같아져 버리고 만다는 말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분명 내가 살아가고 있는 '광주 광역시'의 가을 바람이나 해질녁 붉게 타올라 물든 저녁 노을이 버스로 40분 거리의 담양에서 불어대는 바람과 저녁노을과 다를바가 없을터인데도 그 느낌이 천차 만별로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아마도 산이 있고 없음의 차이, 강이 있고 없음의 차이, 그리고마음의 평화와 안정, 욕심의 있고 없음의 물질적인 이유때문이 아닐까?
어찌보면 송강 정철은 을사사화라는 당쟁의 희생양으로 나이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담양 창평에 내려옴으로써 수많은 문인들과 만나고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이 그의 문학세계와 생활, 인격형성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우연인 동시에 행복의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만약 그가 그런 어려움과 시련의 과정 없이 태어난 한양에서 그대로 아무 걱정 없이 성장했다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알려질 수 있는 문인이 되었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사람은 어떠한 시련이 있어야만, 고통이 있고 그것을 참고 견뎌내야만 더 큰 나 자신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말처럼 말이다. 이런점에서 송강 정찰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고난을 많은 대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이겨냄으로써 호탕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송강 정철처럼 매사에 올바른 신념과 의지로 내 삶의 발자취를 정말이지 아름답고 호탕하게, 정말이지 '저 녀석 진짜 멋진 놈이다'란 말을 들을 정도로 작은일에 왈가왈부 하지 말고 멋지게 살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호남 시가 문단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전남 담야의 가사 문학권으로의 짧지만 의미심장했던 나의 늦가을여행은 여기서 그 끝을 맺어야 겠다.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등 대학교 1학년때 고전 문학 개론에서 자주 들어왔던 우리 지역의 문학가들의 옛 발자취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만져보고 앉아보고 느껴볼 수 있어서 나는 국문인이라는 하나의 자부심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고등학교때 국어 수업시간중 배우는 내용에서 가사 문학과 시조 문학등의 고전 문학을 가장 좋아했는데 내가 직접 그 문학의 산실처를 찾아가게 되다니...... 아직도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가끔씩 들때가 있다. 내가 직접 송강이 거닐던, 석천 임억령이 거닐던, 하서 김인후가 거닐던 곳을 밟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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