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수(隋)나라에 이은 중국의 왕조.
<정치>
<제도>
<문화>
<당나라와 한반도와의 관계>
<정치>
<제도>
<문화>
<당나라와 한반도와의 관계>
본문내용
보내어 신라를 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두 번째 온 당나라 사신을 굴에 가둠으로써 두 나라의 숙명적 대립은 시작되었다. 645년 이래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668년 고구려도 신라와 당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로써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는 막을 내리고 당나라는 백제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 등 5도독부(都督府)를 두었으며, 고구려의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部)를 두고 전 영토를 9도독부, 42주(州), 100현으로 나누었다. 669년 고구려민 2만 8200호(戶)를 인구가 희소한 중국의 내지(內地)로 옮기는 이민정책을 써서 고구려 유민의 실질적 예속화를 꾀하였다. 이에 앞서 당나라는 신라에도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설치, 문무왕(文武王)을 계림도독으로 삼아 한반도의 완전귀속을 꾀하였다. 이로부터 당나라와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고토(故土)에서 영토 쟁탈전을 벌여 당나라는 677년(문무왕 17)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만주 撫順 부근)으로 옮긴 후 양국관계는 거의 정상을 회복하였으며, 699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고토에 진(震:후의 발해)을 세움으로써 당나라와 한반도의 관계는 삼국시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당과 발해는 초기에 여러 차례의 충돌이 있었으나, 2대 무왕(武王) 때부터는 발해에서 태도를 바꾸어 당나라의 관제(官制)와 문화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신라는 649년 처음으로 당의 의관(衣冠)을 사용하고, 650년 당의 연호(年號)를 사용함으로써 당의 문화 및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처음부터 시작된 당제(唐制)의 채용은 통일 후에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여러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또한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당나라의 율령격식을 많이 섭취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최초의 중세적 전제왕국(專制王國)을 확립한 고려도 선진 전제왕국인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제를 정비하였고 이와 같은 고려의 제도는 다음의 조선왕조에 다시 계승되었다. 교육에 있어서도 삼국이 귀족의 자제를 당나라 최고학부인 국학(國學:國子監)에 유학시켜 학문을 닦게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이를 본떠 최고교육기관으로서 국학을 두었으며, 고려도 이를 계승하여 국자감(國子監:후에 국학·성균관 등으로 개칭)을 두는 등 학문 전수(傳授)와 고급관리 양성에 있어서도 당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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