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동서
2. 동도서기의 숨은 뜻
3. 서양인의 동양의식
4. 헤세와 중국의 정신
5. 헤세와 우리
2. 동도서기의 숨은 뜻
3. 서양인의 동양의식
4. 헤세와 중국의 정신
5. 헤세와 우리
본문내용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막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이에 대해서는, 정세근, 「디지털 문화의 철학적 이해」, 『21세기 문학』, 2000년 겨울호(2000.11.)를 볼 것.
헤세는 라이프니쯔의 보편학(mathesis universalis)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주역』의 기호뿐만 아니라, 중국의 언어조차 그 표의(表意)적 가치 때문에 초국가적이고 범세계적인 언어로 성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유리알 유희』의 중심무대인 카스탈리엔 종단이 곧 그러하다.
5. 헤세와 우리
헤세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정말 대단하다. 『데미안』에서 『싯다르타』까지, 그리고 『유리알 유리』에서 『수레바퀴 밑에서』까지, 젊은 시절 한국청춘의 영혼이 그에게 매달려 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세는 우리에게 의미가 크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교는 일정 부분 중국의 것, 한국의 것, 일본의 것이지 인도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도는 결코 불교국가가 아니다. 삼장법사 현장(玄藏)이 7세기에 인도를 방문했을 당시 벌써 불교는 쇠퇴하고 본디의 힌두 전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결국 불교의 탄생은 인도였지만, 그것의 발전과 유지는 동아시아에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도 중국은 공산혁명 이후에 사찰이 파괴되는 등 유심론에 대한 공격 때문에 너무도 많은 전통을 잃어버렸고, 일본은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하는 바람에 불교의 절대고독을 지키지 못하고 사회화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불교는 이른바 석가의 종지를 나름대로 잘 살리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불교학자들보다 더욱 친불교적인 연구환경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서구의 문학자에 의해 각색된 불교를 다시금 번역하여 받아들인다면 재번역의 단계만을 늘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헤세는 동양,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경전의 서구적 전달자이자 번안자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번역을 다시 번역하는 이중번역자는 아닌지 생각해볼 중요한 시점이다.
게다가 그는 중국학자이지 결코 한국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인도와 일본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한국을 알지는 못했다. 그가 말하는 동양이란 거개는 중국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동양이라는 이름 때문에 헤세를 너무도 사모한다면 그는 엉뚱하게 사랑 받는 꼴일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헤세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좀 더 철저히 물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 이에 대해서는, 정세근, 「디지털 문화의 철학적 이해」, 『21세기 문학』, 2000년 겨울호(2000.11.)를 볼 것.
헤세는 라이프니쯔의 보편학(mathesis universalis)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주역』의 기호뿐만 아니라, 중국의 언어조차 그 표의(表意)적 가치 때문에 초국가적이고 범세계적인 언어로 성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유리알 유희』의 중심무대인 카스탈리엔 종단이 곧 그러하다.
5. 헤세와 우리
헤세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정말 대단하다. 『데미안』에서 『싯다르타』까지, 그리고 『유리알 유리』에서 『수레바퀴 밑에서』까지, 젊은 시절 한국청춘의 영혼이 그에게 매달려 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세는 우리에게 의미가 크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불교는 일정 부분 중국의 것, 한국의 것, 일본의 것이지 인도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도는 결코 불교국가가 아니다. 삼장법사 현장(玄藏)이 7세기에 인도를 방문했을 당시 벌써 불교는 쇠퇴하고 본디의 힌두 전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결국 불교의 탄생은 인도였지만, 그것의 발전과 유지는 동아시아에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도 중국은 공산혁명 이후에 사찰이 파괴되는 등 유심론에 대한 공격 때문에 너무도 많은 전통을 잃어버렸고, 일본은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하는 바람에 불교의 절대고독을 지키지 못하고 사회화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불교는 이른바 석가의 종지를 나름대로 잘 살리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불교학자들보다 더욱 친불교적인 연구환경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서구의 문학자에 의해 각색된 불교를 다시금 번역하여 받아들인다면 재번역의 단계만을 늘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헤세는 동양,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경전의 서구적 전달자이자 번안자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번역을 다시 번역하는 이중번역자는 아닌지 생각해볼 중요한 시점이다.
게다가 그는 중국학자이지 결코 한국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인도와 일본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한국을 알지는 못했다. 그가 말하는 동양이란 거개는 중국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동양이라는 이름 때문에 헤세를 너무도 사모한다면 그는 엉뚱하게 사랑 받는 꼴일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헤세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좀 더 철저히 물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