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목차
머리말
1. 중국과의 조공외교 관계
2. 공녀요구의 목적
3. 공녀의 헌납 상황
1) 고려시대 원에 대한 공녀
2) 조선전기 명에 대한 공녀
3) 조선후기 청에 대한 공녀
4. 공녀의 선발과정
5. 공녀의 폐단 및 기피실태
6. 공녀 출발시의 참상
7. 공녀중지 운동
1. 중국과의 조공외교 관계
2. 공녀요구의 목적
3. 공녀의 헌납 상황
1) 고려시대 원에 대한 공녀
2) 조선전기 명에 대한 공녀
3) 조선후기 청에 대한 공녀
4. 공녀의 선발과정
5. 공녀의 폐단 및 기피실태
6. 공녀 출발시의 참상
7. 공녀중지 운동
본문내용
』 권 26, 효종고사본말 청사사문)
또한 당시에 종부시 제조로 있던 오준(吳竣)도 말하기를, “처녀선발의 명이 내리자 금린군이 스스로 딸이 있다고 하면서, 자색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발되게 되었다.” 이것을 보면 금림군이 관직이나 물품을 탐내서 자청한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궁녀로 끌려간 처녀들의 일가 친척에게도 많은 혜택이 부여되었다. 먼저, 1차로 헌납된 처녀들의 경우를 보면, 처녀들과 그 부모들의 신분이 관비(官婢)나 기생 등 천민이었는데, 그들의 부모 또는 동생들을 면천(免賤)시켜 양인(良人)이 되도록 하는 신분상승의 배려를 해주었다. 강원도에서 선발된 양양 기생 구절(九節)의 경우, 부모가 모두 연로하여 관노(官奴)인 동생을 면천시켰고, 전라도 강진의 관비인 목단(牧丹)과 경상도 창원의 기생 영개(永介)의 동생들도 관노였으나 역시 면천의 은전이 베풀어졌다.
2차로 헌납된 처녀들의 가족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이 내려졌다. 이 때에는 아버지의 신분은 양반이고 어머니만 천민이 경우가 많았는데 역시 어머니 또는 동생을 면천시켜 주었다. 그리고 부모에게 관직이나 곡식을 하사하거나 세금을 감면시켜 주기도 하였다.
11. 공녀의 영향
공녀의 헌납 문제는 고려와 조선인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요 비극이었다. 또 그로 인하여 풍속이 크게 훼손되는 등 정치,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녀문제는 고려, 조선의 정계에 커다란 두통거리의 하나였다. 중국과의 사대외교 관계상 이는 피할 수 없는 과제였기 때문이다. 공녀를 데려가기 위한 사신이 오면 조정은 한동안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다. 급작스럽게 공녀 선발을 위한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처녀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령을 내리는 동시에, 전국에 관리를 파견하여 처녀선발 작업에 들어가는 등 그야말로 온 조정이 비상사태에 돌입하곤 하였다.
국왕까지 직접 나서서 뽑은 처녀들이 중국 사신들에 의하여 퇴짜를 맞을 경우에는 국왕이나 해당 관리들이 모두 전전긍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국사는 뒤로 한 채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리들이 이 일에 매달려야 했으니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공녀문제는 백성들에게도 크나큰 고통과 공포의 대상 이었다. 공녀를 뽑아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귀한 딸을 뺏기지 않으려는 부모들과 처녀들의 눈물겨운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부모들은 어린 딸을 일찍 결혼시키거나 멀쩡한 처녀를 중풍걸린 병자처럼 보이게 하거나 또는 얼굴에 약을 발라 흉하게 만드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이로 인하여 살인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처녀들은 처녀들 대로 이국 땅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삭발을 한다든가 스스로 목을 매거나 우물에 빠져 자살하는 등의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이처럼 공녀의 헌납은 순박한 백성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전국을 온통소요 속에 빠뜨렸다. 불행하게도 공녀로 끌려간 처녀의 부모, 친척들의 가슴은 근심과 걱정으로 시커멓게 멍들기 마련이었다.
이와 같이 공녀문제는 고려와 조선에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악영향을 끼쳤으나, 또 하나의 중대한 영향은 자녀를 이역만리로 보내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딸을 어렸을 때 출가시키는 이른바 조혼(早婚)의 풍습을 낳은 점이다.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자녀를 이른 나이에 혼인시키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된 초기부터였다. 원종 때 다루가치(고려에 설치된 원의 군사령관 겸 지방장관)였던 탈타아가 그의 며느리를 고려 재상가문에서 구하려고 하자 딸을 가진 자들이 미리 겁을 먹고 사위를 맞아들였다는 사실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또 충렬왕 때도 공녀를 선발하려 하자 숨어서 사위를 맞아들이는 자들이 많았던 사실로 보아 이 당시에는 이미 조혼이 일종의 풍습으로 정착되었던 것 같다. 조혼의 풍습은 또한 사위를 일찍 맞아들이는 예서제(預壻制)를 촉진하였다. 이처럼 조혼 풍습과 예서제는 처녀의 약탈을 피하고자 한 민족항쟁의 소산이었다.
조혼의 풍습은 고려말부터 시작된 이래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져서 처녀들은 대개 10세 미만만 넘으면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조혼은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으므로 조선왕조에서는 혼인연령의 하한선을 남자 15세, 여자 14세로 하는 법령을 『경국대전』에 명시하여 조혼을 금지하려고 하였으나, 조선말기 까지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이처럼 고려, 조선시대에 조혼이 유행하게 된 이유는 대가족제도, 중매혼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공녀 문제에 있었던 것이다.
공녀는 고려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원나라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고려 여성들에 의한 고려 생활 양식의 전파가 그것이었다. 고려 출신 궁녀들로 말미암아 원나라 황실의 소박하고 무미건조한 생활환경이 고려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우수한 복식제도와 요리기술이 원나라에 크게 유행하게 되어 고려양(高麗樣)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까지도 그 유풍이 남아 몽고에서는 고려만두(高麗饅頭), 고려병(高麗餠)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명나라 초기에 지어진 『경신외사』(庚申外史)라는 야사에도 원나라 말기의 의복, 모자, 그릇 등의 체제가 모두 고려의 그것과 같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어쨌든 공녀의 헌납은 고려와 조선왕조를 크게 동요시킨 비극적인 사건인 동시에, 중국 사회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국제적인 성격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또한 공녀는 역사의 희생양이요, 약소국의 비애를 나타내 주는 상징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원사』
어숙권, 『고사촬요』
한치윤, 『해동역사』
이긍익, 『연려실기술』
유홍열,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 『진단학보』18, 1957.
조좌호, 「이조 대명 공녀고」, 『황의돈고희기념사학논총』, 1960.
김갑주, 「병자호란 후 대청공녀고」, 『동국사학』14, 1980.
이용범, 「기황후의 책립과 원대의 자정원」, 『역사학보』17?18, 1962.
전해종, 「한중 조공관계 개관」, 『한중관계사연구』, 일조각, 1970.
장동익, 『원대려사자료집록』, 서울대 출판부, 1997.
또한 당시에 종부시 제조로 있던 오준(吳竣)도 말하기를, “처녀선발의 명이 내리자 금린군이 스스로 딸이 있다고 하면서, 자색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발되게 되었다.” 이것을 보면 금림군이 관직이나 물품을 탐내서 자청한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궁녀로 끌려간 처녀들의 일가 친척에게도 많은 혜택이 부여되었다. 먼저, 1차로 헌납된 처녀들의 경우를 보면, 처녀들과 그 부모들의 신분이 관비(官婢)나 기생 등 천민이었는데, 그들의 부모 또는 동생들을 면천(免賤)시켜 양인(良人)이 되도록 하는 신분상승의 배려를 해주었다. 강원도에서 선발된 양양 기생 구절(九節)의 경우, 부모가 모두 연로하여 관노(官奴)인 동생을 면천시켰고, 전라도 강진의 관비인 목단(牧丹)과 경상도 창원의 기생 영개(永介)의 동생들도 관노였으나 역시 면천의 은전이 베풀어졌다.
2차로 헌납된 처녀들의 가족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이 내려졌다. 이 때에는 아버지의 신분은 양반이고 어머니만 천민이 경우가 많았는데 역시 어머니 또는 동생을 면천시켜 주었다. 그리고 부모에게 관직이나 곡식을 하사하거나 세금을 감면시켜 주기도 하였다.
11. 공녀의 영향
공녀의 헌납 문제는 고려와 조선인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요 비극이었다. 또 그로 인하여 풍속이 크게 훼손되는 등 정치,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녀문제는 고려, 조선의 정계에 커다란 두통거리의 하나였다. 중국과의 사대외교 관계상 이는 피할 수 없는 과제였기 때문이다. 공녀를 데려가기 위한 사신이 오면 조정은 한동안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다. 급작스럽게 공녀 선발을 위한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처녀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령을 내리는 동시에, 전국에 관리를 파견하여 처녀선발 작업에 들어가는 등 그야말로 온 조정이 비상사태에 돌입하곤 하였다.
국왕까지 직접 나서서 뽑은 처녀들이 중국 사신들에 의하여 퇴짜를 맞을 경우에는 국왕이나 해당 관리들이 모두 전전긍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국사는 뒤로 한 채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리들이 이 일에 매달려야 했으니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공녀문제는 백성들에게도 크나큰 고통과 공포의 대상 이었다. 공녀를 뽑아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귀한 딸을 뺏기지 않으려는 부모들과 처녀들의 눈물겨운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부모들은 어린 딸을 일찍 결혼시키거나 멀쩡한 처녀를 중풍걸린 병자처럼 보이게 하거나 또는 얼굴에 약을 발라 흉하게 만드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이로 인하여 살인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처녀들은 처녀들 대로 이국 땅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삭발을 한다든가 스스로 목을 매거나 우물에 빠져 자살하는 등의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이처럼 공녀의 헌납은 순박한 백성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전국을 온통소요 속에 빠뜨렸다. 불행하게도 공녀로 끌려간 처녀의 부모, 친척들의 가슴은 근심과 걱정으로 시커멓게 멍들기 마련이었다.
이와 같이 공녀문제는 고려와 조선에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악영향을 끼쳤으나, 또 하나의 중대한 영향은 자녀를 이역만리로 보내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딸을 어렸을 때 출가시키는 이른바 조혼(早婚)의 풍습을 낳은 점이다.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자녀를 이른 나이에 혼인시키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된 초기부터였다. 원종 때 다루가치(고려에 설치된 원의 군사령관 겸 지방장관)였던 탈타아가 그의 며느리를 고려 재상가문에서 구하려고 하자 딸을 가진 자들이 미리 겁을 먹고 사위를 맞아들였다는 사실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또 충렬왕 때도 공녀를 선발하려 하자 숨어서 사위를 맞아들이는 자들이 많았던 사실로 보아 이 당시에는 이미 조혼이 일종의 풍습으로 정착되었던 것 같다. 조혼의 풍습은 또한 사위를 일찍 맞아들이는 예서제(預壻制)를 촉진하였다. 이처럼 조혼 풍습과 예서제는 처녀의 약탈을 피하고자 한 민족항쟁의 소산이었다.
조혼의 풍습은 고려말부터 시작된 이래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져서 처녀들은 대개 10세 미만만 넘으면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조혼은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으므로 조선왕조에서는 혼인연령의 하한선을 남자 15세, 여자 14세로 하는 법령을 『경국대전』에 명시하여 조혼을 금지하려고 하였으나, 조선말기 까지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이처럼 고려, 조선시대에 조혼이 유행하게 된 이유는 대가족제도, 중매혼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공녀 문제에 있었던 것이다.
공녀는 고려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원나라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고려 여성들에 의한 고려 생활 양식의 전파가 그것이었다. 고려 출신 궁녀들로 말미암아 원나라 황실의 소박하고 무미건조한 생활환경이 고려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우수한 복식제도와 요리기술이 원나라에 크게 유행하게 되어 고려양(高麗樣)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까지도 그 유풍이 남아 몽고에서는 고려만두(高麗饅頭), 고려병(高麗餠)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명나라 초기에 지어진 『경신외사』(庚申外史)라는 야사에도 원나라 말기의 의복, 모자, 그릇 등의 체제가 모두 고려의 그것과 같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어쨌든 공녀의 헌납은 고려와 조선왕조를 크게 동요시킨 비극적인 사건인 동시에, 중국 사회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국제적인 성격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또한 공녀는 역사의 희생양이요, 약소국의 비애를 나타내 주는 상징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원사』
어숙권, 『고사촬요』
한치윤, 『해동역사』
이긍익, 『연려실기술』
유홍열,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 『진단학보』18, 1957.
조좌호, 「이조 대명 공녀고」, 『황의돈고희기념사학논총』, 1960.
김갑주, 「병자호란 후 대청공녀고」, 『동국사학』14, 1980.
이용범, 「기황후의 책립과 원대의 자정원」, 『역사학보』17?18, 1962.
전해종, 「한중 조공관계 개관」, 『한중관계사연구』, 일조각, 1970.
장동익, 『원대려사자료집록』, 서울대 출판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