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북진정책과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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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북진정책과 재평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 윤관의 정치적 배경과 위상

Ⅲ. 고려 북진정책에 대한 인식

Ⅳ. 동북아의 정세와 윤관의 여진 정벌과

Ⅴ. 윤관의 동북 구성과 고려의 북진정책

Ⅵ. 결론

본문내용

고 있는 것 같다. 만약에 고려의 위치자체가 부정확하다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동북9성의 위치도 변하게 된다. 우리는 먼저 사료에 나오는 지명을 근거로 고려의 위치를 정하고 그 다음에 역사적 위치를 사료의 내용을 따라야만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북9성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증거로는 조선시대을 들 수 있다. 세종대왕 당시 4군, 6진을 개척하려고 하자, 중신들이 명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반대를 하였다는 점을 유추 적용해보면 고려시대에 윤관이 쌓은 동북 9성중, 공험진이 북만주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북방으로 진출하게 되고, 그렇다면 함흥평야에 동북9성이 있지 않았다는 근거가 된다. 만일 동북9성을 근거로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이라고 우기는 4군 6진을 개척했다면 오히려 진출이 아니라 거꾸로 반도로 내려와야 이론상으로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북 9성이 지금의 함흥평야 일대라면 4군 6진개척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8성은 함흥평야에 있고, 나머지 공험진은 북만주에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에 전쟁을 위한 성을 축조하는데 그것이 방어 등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인다. 그럼 만일 북만주에 9성이 있었다면 그것이 과연 고려의 동북지방에 위치라고 말할 수 있을지 그림을 참조해 보면 이렇다. (그림참조)
지금의 역사가 맞다면
지금의 역사가 조작되었다면
이렇게 그림을 통해서 보면 동북 9성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서북 9성이 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고려의 위치가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것 아니면, 고려가 반도에 있었다면 동북 9성이 될 수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고려가 대륙에 있어야 북만주 일대가 동북 9성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야 방어에도 적합하게 된다. 만일 고립이 된 곳이라면 여진이 쉽게 취할 수 있었겠지만, 여진은 동북 9성을 빼앗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침략을 감행하다가 도저히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깨닫자, 돌려달라고 요청한다.
Ⅵ. 결론
이상에서 尹瓘의 북정을 둘러싸고 있는 9성의 위치와 영역문제에 대해 고려왕조의 거란과의 약30여년간의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12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동북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대두한 여진족의 금이 거란을 전복시키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대두하면서 안정적 국면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런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윤관을 통해 여진정벌을 대대적을 실시하게 되는 점들을 중심으로 내용을써보았다. 곧 여진 정벌은 당시 정치적으로 윤관 등의 정국주도권이 지속될 수 있는 여건으로 작용된 셈이라 말할수 있다. 그 이유는 윤관의 여진정벌이 한때 고전함으로써 숙종 후반기 국정운영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일반관료들의 불만이 표출될 수 있었으나,숙종의 지지를 받고 있는 윤관 세력판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의 사망으로 인하여 왕위교체는 윤관을 비롯한 측근관료의 입지를 크게 좁혀 놓았다. 결국 여진정벌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이것을 윤관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국내외적안정추구라는 명분하에 9성환부와 참전인물 탄핵을 통해 윤관의 세력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동북9성중 공험진의 위치에 관한 연구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되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일제시대의 일본 학자들, 그리고 한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끊임없는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명확한 이론과 지리적인 위치를 제시하여 주는 글은 거의 찾아볼수 없었다. 조선초기의 관찬사서들은 과도한 정치적인 경향의 표출로 인해 그 중립성을 잃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실학자들은 그 역사적인 의식과 지식의 결여로 인한 문제점을 많이 표출하고 있으며, 일제시대의 학자들은 고려의 강역을 되도록이면 축소하고자 하는 모습을 노출하였고, 해방후의 한국학자들은 실제로 현지에 가서 답사를 할 수 없었다는 제약때문에 탁상공론적인 모습만을 띄게 되었다.
현재의 학계의 정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검토해본 논문들에 따르면 아무래도 총독부의 위촉을 받아서 정밀한 답사를 한 후 논문을 쓴 이께우찌씨의 함흥평야 설이 가장 큰 지지를 받을것 같다. 그러나 아직 공식화된 공론은 없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단지 몇몇 설이 있다라고만 밝히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아쉬었던 점은 북한의 논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발표된 논문이 없지않이 있겠지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尹瓘의 9城 문제는 실제 그 강역이 북한 지역으로 집중되기 때문에 북한학계에서 어느 정도 연구가 진척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또 하나는 조선후기 실학파들의 저서를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학자들의 저서중 여유당전서에 나오는 尹瓘의 북정기사는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고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안타깝게도 읽어보지 못하였다.
의욕을 가지고 시작한 작업이 끝내 필자의 역량부족으로 졸속으로 끝난것이 안타깝다. 그동안 高麗史도 몇번 읽어보고, 여러 사람의 논문도 몇번씩 읽어보았지만, 어떤 사람의 논문도 완전한 것은 없었다. 이께우찌씨와 윤무병씨의 논문에서는 그 좁은 지역에 수많은 사람을 徒民하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또한 高麗史같은 책들을 완전히 위조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못내 아쉬었고, 방동인씨와 김구진씨의 논문에서는 창의적인 생각이 돋보이나 논리의 비약이 너무나 많았다. 앞의 윤무병씨의 논문을 의식해서 비판하려 노력한 탓인지 약간 고집이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高麗史의 기사를 보면 짧은 시일만에 弓漢伊에 도달하고 있고 성을 축조하고 있는데, 현대전의 기동성을 생각하여도 지나치게 빠른 행군속도라는 것을 주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필자는 9성의 위치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이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필자는 최소한 자신만의 확신이라도 가지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계속적으로 읽어보면 볼수록 미궁에 빠지는 듯한 인상을 숨길수가 없다.
기회가 닫는다면 尹瓘의 북정에 관한 북한쪽의 논문을 읽어보고 싶다. 더욱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필자가 직접 답사를 해서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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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19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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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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