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天道敎]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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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천도교의 발자취

2. 천도교란 어떤 종교인가

3. 교리를 통해서 본 천도교

4. 천도교의 수행과 신앙방법

5. 천도교의 민중, 민족, 문화운동

본문내용

년(1945) 8·15 후 소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우리 나라의 신탁통치를 결의하자 이에 대한 찬반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포덕 87년(1946)부터 다음해까지 한국의 통일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놓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두 차례에 걸쳐 열렸으나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포덕 88년(1947)에 유엔총회에서 ‘남북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가결하자 북한은 이를 반대하여 김일성 중심의 공산정권 수립을 단독으로 진행하였고, 남한에서는 북한이 자유총선거를 거부함에 따라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북이 각기 정부를 따로 세우게 될 경우 한국은 완전히 남북으로 분열되어 동족상잔의 비운을 면치 못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긴박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천도교는 남북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곧 ‘남북분열저지운동’과 ‘청우당(靑友黨)운동’이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해방 공간을 맞은 우리 나라는 각종 이념과 주의에 의한 정당과 정치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천도교에서는 포덕 86년(1945) 8·15해방 다음달에 천도교청우당을 부활하게 된다. 이때 부활된 청우당은 단지 종교적 활동만이 아니라 천도교의 이념에 따라 ‘신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활동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후 청우당은 당의 정책 설정을 위하여 천도교의 교리와 역사 및 현실인식에 기초하여 정치이념을 수립한다. 이러한 정책의 수립에 따라 천도교청우당은 포덕 86년(1945) 10월 31일 제 1차 전당대회를 통하여 ‘민족통일기관 결성 촉진’을 결의하였고, 이어서 12월 15일에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유교, 천주교의 각각 대표 100명씩을 연합하여 조선독립촉성을 위한 연합발기대회를 열고, 20일에는 조선독립의 완성을 촉진하자는 의미로 6개 종단을 모아 조선독립촉성종교단체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포덕 86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한다. 이후 조선공산당이 신탁통치를 찬성하자, 포덕 87년(1946) 1월 16일 조선공산당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즉 청우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행동할 것을 천명하고, 포덕 86년 12월과 87년 1월 반탁운동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민족 독립과 해방에 의거한 정치 활동을 펴나갔던 것이다. 이후 좌·우 분열이 일어나게 되자, 포덕 87년(1946) 2월 9일 천도교청우당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정치적 기본노선을 이탈한 편좌(偏左), 편우(偏右)의 모든 경향을 배격하고 민족적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포덕 87년 3월 중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개최되는 때에 즈음하여, 미·소 양국의 군대 철수와 내정(內政) 간섭의 배제를 미군정 당국에 요구하기도 한다. 즉 천도교청우당은 ‘남북통일, 좌우합작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반대’라는 기본 노선을 견지하며,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그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또한 포덕 88년(1947) 1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에 즈음하여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인사들이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단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자, 청우당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등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하게 된다. 그러나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정책이 미군정과 한민당 등의 우익계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여 청우당의 주요 간부들이 검거되기도 한다.
이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의 수립을 이룩하고자 했던 천도교청우당의 염원은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을 희망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인 포덕 90년(1949) 8월 10일 “북로당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지령을 받아 천도교 내에서 남조선 천도교의 중심 세력을 분리시키고 북한 청우당 세력을 부각시키며, 파괴·암살을 위한 지하 당원”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당원 30여 명이 검거되기도 한다. 그리고 초지일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남조선 천도교청우당은 포덕 90년(1949) 12월 26일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거하여 강제로 정리·해체되고 말았다.
천도교의 조직체계 및 경전
천도교의 대표기관은 천도교중앙총부이다. 천도교는 중의제(衆議制)에 의한 민주적 중앙집권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중앙총부의 체제는 2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교령사(敎領司)·현기사(玄機司)·종무원(宗務院)·종의원(宗議院)·감사원(監査院) 등의 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교화행정기구와 또 하나는 정신지도기구인 연원회(淵源會)라는 속인제(屬人制) 조직이 있다.
중앙총부의 최고 결의기관은 3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전국대의원대회이다. 여기서 교회의 대표인 교령을 비롯해서 종의원의원·중앙감사 등 주요 교직자를 선출하며, 교령이 지명한 종무원장을 인준한다. 중앙총부 산하에는 각 지방에 교구(敎區) 및 전교실(傳敎室)이 있어 교구장을 중심으로 교인들의 교화 및 포덕(포교)을 담당한다. 또한 시일(侍日 : 일요일)에는 교구별로 교인들이 교당에 모여 시일식(侍日式), 즉 정기적인 종교집회를 거행하며, 그 밖에 교인들의 수련 및 수행을 위한 수도원이 전국 곳곳에 있다.
연원회는 도정(道正) 및 도훈(道訓)으로 구성되며, 연원회의에서 의장단을 선출하고 예우직인 종법사(宗法師)와 선도사(宣道師)를 추대한다.
부문단체로는 청년회·여성회·종학원·동학민족통일회 등이 있고, 출판기관 신인간사(新人間社)에서 월간지 『신인간』과 『천도교월보』를 발행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총부와는 별도로 재단법인 천도교유지재단이 있다.
경주에는 천도교의 발상지인 용담성지(龍潭聖地)가 있으며, 제1세 교조 수운대신사 최제우 선생의 생가 유허지(遺墟地)가 있다. 그리고 전국 각처에는 교조의 유적과 동학혁명 등 천도교의 사적지가 산재해 있다.
천도교의 경전으로는 수운대신사가 저술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가 있다. 그리고 제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의 「해월신사 법설」과 제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의 「의암성사 법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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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2페이지
  • 등록일2004.04.25
  • 저작시기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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