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화두선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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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진리, 앎

2. 무(無) 혹은 공(空) - 실재와 관련하여
(1)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그리고 공(空)
(2) 언어와 침묵

3. 화두
(1) 전복의 기술
(2) 또 다른 언어

4. 깨달음, 방편

본문내용

는 개념에 얽매이지 말라는 백장의 설, 교훈에 끄덕끄덕, 역시 또 백장의 손가락에 시선을 맞추고 있을 여러 사람들의 통념을 깬다. 황벽의 질문에 대해 다시 또 "노인이 대답을 잘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황벽의 질문은 앞부분에 대한 전복이며 그런 까닭에 그것은 어떤 묵직한 내용을 담고 있어 정적(靜的)인 언어가 아니라 앞부분을 뒤엎는 움직임의 언어이다. 황벽의 질문에 대해 백장이 "어찌어찌 되었을 것이네"라고 구체적으로 답해준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백장은 기특한 제자 황벽을 가까이 부르는데, 이미 상황에 대한 메타적 시선을 겸비하고 있는, 또 스승이 구체적으로 답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황벽은 스승의 뺨을 올려친다. 이에 대한 백장의 웃음, 그것은 깨달은 이들, 혹은 무언가 아는 이들 사이의 흥겨운 대화이다.
(2) 또 다른 언어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기술로서의 언어가 화두 언어라면 그것은 1 대 1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다시 말하자면 선사들의 느닷없는 고함 한 번에 대오할연할 수 있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1 대 1 대화 상황,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선문답적 언어 구조, 선사들의 소통 커뮤티니 내의 언어이다. 선사들이 누구에게나 다 '할'이라고 외치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소리에 누구나 다 깨침을 얻는 것은 아닐 테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언어와 진리 사이의 문제로 돌아갈 수 있다. 진리란 것이 세상의 공(空)함을 체득하는 것이며, 까닭에 언어로서 담을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하나의 세계관 구실을 할 때 이에 대해서는 명백한 언어가 있어야 한다. 붓다의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이 그것이다. 또한 위에서 말한 바대로 문제가 비롯되는 부분, 즉 공(空)인데 공(空)을 모르다는 것이 시작되는 부분, 고통이 시작되는 부분, 그것은 그런 것이 가능하게끔 하는 식(識), 무의식의 문제가 있다. 문제의 원인, 식(識)에 대한 논의는 화두언어와는 또다른 언어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학적(學的) 언어와도 같은, 냉철한 언어이다. 그것은 1 대 1 관계가 아닌 다(多) 대 다(多) 관계에서 소통될 수 있는 언어이다. 언어를 도구로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즉 기의에 얽매이지 않고 적절히 상황 속에서 언어의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언어의 사용방식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메타적 언어 방식과 붓다의 대중설법과도 같은 명징한 언어 방식 두 가지 모두를 겸해야 하는 것이다.
붓다가 말한 12연기는 이 지점에 있다. 선사들은 무엇 때문에 세상의 고통이 비롯하는지 말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언어 운용 방식에 있어 중도(中道)를 실천하는 방식이다. 언어에 대한 경계를 경계로 그칠 것이지 언어를 버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마치 목욕물 버릴 때 아이까지도 같이 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선사들의 경계, 혹여 제자들에게 책을 읽지 못하게 했던 성철 스님의 경계는 지나친 감이 있다.
4. 깨달음, 방편
과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글의 서두에 '앎'을 주관적 인식을 넘어 객관적 인식을 체화하는 인식을 전환이라 말하였지만, 그 인식의 전환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붓다는 모든 고통이 발생하는 것은 무명(無明)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그러므로 그 무명을 깨는 것이 바른 앎을 얻는 것이며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무명을 깨는 것은 일단 자아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나(我)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식의 전환이란 단지 어떤 한 세계관에 동의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살아가고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식의 전환이 실존의 전환으로 연결될 수 있고 맞물릴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무명을 깨뜨리는 이 지점에 있다. 유위전변하는 세계 속에서 남는 것은 순간 순간의 의식 상태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공(空)을 체현해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깨달음일 테며 따라서 깨달음이란 돈오의 지속, 혹은 점수의 지속이라고 말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은 또한 언어의 구속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언어로부터 해방된 이가 사용하는, 도구적으로만 사용하는 언어는 말 그대로 자유자재이여야 한다. 자유자재란 단지 제멋대로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어가 방편일 수 있는 것은 단지 화두로서만, 즉 수행 공간에서 수행의 한 방식으로서만 작용하기 때문은 아니다. 앞에서 잠깐 말하였지만, 학적(學的) 언어, 혹은 논리적 언어의 운용 방식은, 현대 사회가 합리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나아가 현대 사회에서 불교가 제 몫을 다할 수 있기 위해, 또는 불교의 언어가 단지 (대중이 되었든 수행승이 되었든, 누군가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존재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화두란 중국적 언어 특징의 소산
) 『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 2000, 통나무, 김용옥
일 수 있으나, 그것이 한국 불교 풍토에 뿌리박아 지금까지 내려왔음은 그 나름의 시대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유지되었던 나름의 생명력 덕분일 것이다. 문제는 이제 현대 사회에 화두 언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방편이 방편일 수 있는 것은, 상대적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절대적 근거에 있을 것이다. 선불교 언어가 현대에 살아남기 위해 현대라는 상황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의 모색과 더불어 그의 근거에 대한 보다 정치한 모색 또한 현대 한국 불교가 해결해야할 중요한 과제라 하겠다.
♤인용, 참고 문헌
『서양철학사』요하네스 힐쉬베르거, 2002, 이문출판사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김상환, 2002, 창작과 비평사 中 2부 1장 「언어에 대하여」
『주체는 죽었는가』 강영안, 1996, 문예출판사 中 제 5장 라깡의 주체와 욕망
『무문과, 혹은 너는 누구냐』한형조, 1999, 여시아문
『유마경』불전간행회 편/박용길 옮김 1995, 민족사
『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김용옥, 2000, 통나무
『조주 - 오쇼 라즈니쉬의 조주어록 강의』손만규 옮김, 1997, 태일출판사

키워드

진리,   불교,   종교,   석가모니,   ,   열반,   해탈,   윤회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4.05.04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8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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