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신문화운동과 모택동사상
2. 모택동의 호남농촌운동 시찰보고
3. 정강산에서 연안까지
4. 인민민주전정시대의 모택동사상
5. 대약진운동과 모택동사상
6. 문화혁명과 모택동사상
7.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2. 모택동의 호남농촌운동 시찰보고
3. 정강산에서 연안까지
4. 인민민주전정시대의 모택동사상
5. 대약진운동과 모택동사상
6. 문화혁명과 모택동사상
7.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을 부정하는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즉, 양헌진은 모순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모택동의`일분위이론`에 대하여 모순의 통일과 계급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합이이일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 노선으로 당내외에서 `수정주의적 경향`과 `자본주의적 성향`이 풍미하게 되자 모택동과 임표와 같은 급진파들은 다시금 계급투쟁과 정치우선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다. 중국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주자파`의 등장과 자본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모택동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급진파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임표는 1963년 2월에 중국인민해방군 정치공작회의를 소집하고 모택동의 군사.혁명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확대하였다. 이와 같은 급진파이 모택동사상 학습운동은 마침내 1966년에는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청산하고 신사상, 신문화, 신풍속, 신관습으로 중국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문화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타도하고 “자본주의계급과 일체의 착취계급의 의식형태를 비판”하는 문화혁명과정에서 모택동은 대중의 혁명정신을 강조하고 중국사회에 존재한다는 모든 `봉건적`, `수정주의적`사상에 대하여 `혁명적 대비판`을 전개하라고 촉구하였다. 대중의 사상혁명은 거대한 물질적 힘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문화혁명과 같은 사상개조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모택동은 주장하였다.
7.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1976년의 모택동의 사망과 문화혁명 4인방에 대한 숙청이 중공 정치사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등소평을 비롯하여 문화혁명 기간에 박해를 받았던 실용주의 지도자들이 대거 복권되면서 모택동사상과 모택동의 공적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실사구시`와 “실천만이 진리를 검중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주장과 함께 모택동사상을 신비화하고 교조화하였던 좌파의 오류를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대중들의 `사상해방`을 촉구하였다. 특히 이들은 계급투쟁과 사상혁명을 강조한 모택동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계급투쟁의 종식을 선언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 지도자들의 모택동사상에 대한 비판과 재평가운동은 1981년 6월에 개최된 중공당 제11기 6중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에 반영되었다. 이 `역사결의`에 의하면 중국공산혁명과정과 사회주의 개조가 완결된 1956년 제8차 전당대회까지의 모택동의 공로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이후에 모택동은 여러 가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즉, 1957년 반우파 운동, 1958년 대약진운동, 그리고 1966년의 문화혁명은 당과 인민에 대하여 커다란 손실을 초래하였으며, 모택동은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모택동의 계급투쟁에 관한 이론, 계속혁명론, 그리고 자본주의의 부활에 관한 경고 등은 막스-레닌주의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모택동사상의 오류로 말미암아 문화혁명과 같은 `대재난`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중국사회에서 계급간의 모순은 사실상 주요한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인민의 나날이 증대하는 물질적, 문화적 욕구와 사회생산과의 모순”이야말로 주요한 모순이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생산력의 발전과 4대 현대화의 달성이 당과 국가의 최대 최고의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모택동사상의 급진적인 측면은 오늘날 혹독한 대상이 되고 있으며, 더 이상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아버지로서 모택동은 개인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7.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1976년의 모택동의 사망과 문화혁명 4인방에 대한 숙청이 중공 정치사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등소평을 비롯하여 문화혁명 기간에 박해를 받았던 실용주의 지도자들이 대거 복권되면서 모택동사상과 모택동의 공적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실사구시`와 “실천만이 진리를 검중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주장과 함께 모택동사상을 신비화하고 교조화하였던 좌파의 오류를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대중들의 `사상해방`을 촉구하였다. 특히 이들은 계급투쟁과 사상혁명을 강조한 모택동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계급투쟁의 종식을 선언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 지도자들의 모택동사상에 대한 비판과 재평가운동은 1981년 6월에 개최된 중공당 제11기 6중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에 반영되었다. 이 `역사결의`에 의하면 중국공산혁명과정과 사회주의 개조가 완결된 1956년 제8차 전당대회까지의 모택동의 공로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이후에 모택동은 여러 가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즉, 1957년 반우파 운동, 1958년 대약진운동, 그리고 1966년의 문화혁명은 당과 인민에 대하여 커다란 손실을 초래하였으며, 모택동은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모택동의 계급투쟁에 관한 이론, 계속혁명론, 그리고 자본주의의 부활에 관한 경고 등은 막스-레닌주의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모택동사상의 오류로 말미암아 문화혁명과 같은 `대재난`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중국사회에서 계급간의 모순은 사실상 주요한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인민의 나날이 증대하는 물질적, 문화적 욕구와 사회생산과의 모순”이야말로 주요한 모순이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생산력의 발전과 4대 현대화의 달성이 당과 국가의 최대 최고의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모택동사상의 급진적인 측면은 오늘날 혹독한 대상이 되고 있으며, 더 이상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아버지로서 모택동은 개인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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