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80년대 학생운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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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연구목적 및 연구방향

II. 학생운동의 개념
1. 운동의 개념
2. 운동의 일반적 성격
3. 학생운동이란 무엇인가

III. 80년대의 학생운동 1 (전반기 80년 - 87년)
1. 80년 - 83년, 폭압기
2. 84년 - 86년 대중운동으로의 발전
3. 87년 6월의 함성

IV. 80년대의 학생운동 2 (후반기 88년 - 92년)
1. 88년 제2기 전대협 - 통일의 깃발을 올리며
2. 89년 제3기 전대협 - 임종석과 임수경
3. 90년 제4기 전대협 - 모든 길은 광주로 통한다
4. 91년 제5기 전대협 - 분신정국
5. 92년 제6기 전대협 - 범청학련과 한총련

V. 80년대 학생운동이 미친 영향
1. 80년 - 87년까지의 평가 대강
2. 88년 - 92년까지의 평가 대강

VI. 결론

본문내용

로 저항의식을 고취시켰다.
2. 88년 - 92년까지의 평가 대강
이 시기는 우선적으로 전대협이라는 전국적인 조직을 통하여 학생운동이 조직성을 완전히 구축한 시기이다. 이러한 조직체의 완성은 이 이전에 있었던 분파논쟁을 전대협이라는 틀 속에서 소화시키면서 단일한 목표와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이 시기 전대협의 학생운동은 전체 민족민주운동 세력권에서 가장 모범으로 평가받으면서 몇 가지의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는 노동운동에서는 전노협을, 농민운동에서는 전농을, 89년 참교육을 표방한 전교조를 연대해 가며 노,농,학 연대를 굳건히 굳쳐나갔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이 시기의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면 첫째, 반미운동의 확산이다. 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이후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으로 이어지는 반미운동은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전대협이 표방반 반미자주화의 기치 아래 사회전반에 확신되어 갔다. 학생운동권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처지를 미국의 신 식민지로 규정하고 수입개방, 무역마찰, 미군의 횡포, 반전반핵, 80년 광주의 미국의 책임을 물으면서 반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도 아니며 은혜의 마라도 아님을 한국사회에 알려낸 것이다.
둘째는 4.19이후 중단되었던 통일운동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88년부터 본격화된 통일운동은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많은 탄압을 받고 있지만 임수경 대표의 평양 파견, 범민족대회의 사수, 범청학련결성 등을 통하여 꾸준히 한국사회에 통일을 인식시키고 있다. 현재의 학생운동이 학생운동 내부에서 통일지상주의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통일운동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통일운동은 통일에 대한 논의 자체가 국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민간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회적인 인식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는 반공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데도 많은 역할을 했다. 임수경 대표의 말대로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말처럼 북한도 "뿔 달린 늑대의 소굴"이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같이 공유해야 할 동반자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VI.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80년부터 92년까지의 우리 나라의 학생운동 전반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약간은 방대하고 긴 시기적 사건을 정리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의식 있는 젊은 학생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학생운동은 그 역사가 다른 나라의 학생운동보다 길고 강한 투쟁성을 가지고 있다. 일제치하 부터 일제에 항거하며 일어난 학생운동은 근대사 속에서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변수로 작용하여 왔고 그 영향력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80년의 큰 아픔으로 시작된 80년대는 그 당시를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많은 책임과 갈등을 안겨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우리 조는 이번 논고를 통하여 그 당시를 살아간 선배학생들의 행동에 약간의 놀라움과 괴리감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첫째, 학생운동은 그 폭력성과 선진적 사상성으로 정부나 언론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고 있지만 우리의 사회 속에서 변혁의 가장 핵심에서 우리 나라의 정치적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드리며 활동하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를 보수하며 그대로 두려는 집단이 있고 반대로 계속해서 변화 발전시키려는 집단이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학생운동은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집단이라고 해야 겠다.
둘째, 80년대의 학생운동은 민주화라는 큰 국민적 정서를 이끌어 내려고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운동에 가장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수많은 열사들과 구속자 수가 증명하듯이 학생운동은 그 순수성을 지키면서 우리의 사회를 좀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이 앞장섰다.
셋째, 80년대 학생운동은 사회전반에 새로운 사상을 전파시켰다. 약해진 반공이데올로기속에서 통일운동이 태동되고, 은혜의 나라 미국을 바로 보는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사회의 다른 계층인 노동자나 농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넷째, 80년대 학생운동은 이론적으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이론적 대립은 학생운동 내부에서 많은 어려움으로 제기되면서 내부적 결합을 수 차례 시도했으나 지금도 한총련 내부에서 다수파인 NL(민족해방)과 소수파인 PD(민중민주)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80년대의 학생운동은 우리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많은 일들을 기억나게 한다. 전체적인 80년대의 학생운동은 모범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한 이유를 보면 학생운동이 항상 대중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소수의 운동권 간부들에 의해서 목표가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정서를 파악하고 그러한 것들을 운동과 연계시켜 나간 점이 80년대 운동을 풍성하게 만들어낸 요인으로 생각된다.
80년 광주의 아픔으로 시작된 80년대 학생들의 생활과 투쟁의 주역들은 이제 공소시효가 끝나 가는 광주민주화항쟁과 9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 동안 변화한 시대적 상황이 그 당시의 극단적인 상황과는 먼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이재호, 김세진 열사가 분신하고 서울대 주변 술집에서 노래소리가 사라지고 술만 먹으면 우는 학생들이 늘어갔다는 그 시대의 학생들은 대학가가 최대의 환락가로 변해 가는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이 글을 끝내면서 80년대를 수놓았던 많은 열사들과 학생운동 지도자들보다는 평범하고 순수성을 간직하고 그 시대를 고민했던 일반 학생들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참 고 문 헌
강신철, "80년대학생운동사", (서울: 형성사, 1988).
조진경,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서울: 백산서당, 1989).
김재희 외, "벗이여 어서 오게나", (서울: 이웃, 1994).
구로역사연구소, "바로 보는 우리역사 2", (서울: 거름, 1990).
"80년대 학생운동 야사", 월간 말 1990년 3월호 - 8월호.
"구국의 강철 대오 전대협", 월간 말 1993년 6월호 -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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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28
  • 저작시기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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