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고구려의 수레와 부강
Ⅲ.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수레
Ⅳ. 고구려와 수레
Ⅴ. 결론
Ⅱ. 고구려의 수레와 부강
Ⅲ.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수레
Ⅳ. 고구려와 수레
Ⅴ. 결론
본문내용
주 이용하는 것이, 수레이니 수레를 이끌 말과 소는 고구려란 국가의 필수요소가 되었고 고구려는 당연히 소와 말의 생산지를 집요히 얻어낼 필요가 생긴 것이다.
고작 7만 마리의 말 밖에 가지고 있지 않던 조선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조선은 말이 없어 기병을 이용하지 못했고 전장에선 조선의 보병은 이웃 나라 기병의 적수가 되질 못했던 것이다. 허나 고구려는 말과 소를 이용해 수레를 이끌거나 아니면 말을 이용해 기병을 만들었다. 기병을 만들다 보니 적도 기병을 이용한다. 그래서 고구려는 더 강한 기병을 원했고 철기병을 생산하게 된다. 동천왕 시절에 위나라 관구검에게 철기5천으로 대적한다. 그럼 이 철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철은 무겁기 때문에 웬만한 무게에 잘 견딜 이동수단이 필요했다. 고구려는 당연히 자국에서 질좋고 성능좋은 수레를 이용해 철을 날랐을 것이다. 이걸 증명하듯 당나라 역사서에는 고구려와 수많은 철에 대한 교역을 했음을 피력하고 있다.
고구려가 전쟁을 잘한 이유는 숭무사상이 바탕이 되어서 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생산시설이 잘 짜여져 있어서 그랬다. 수많은 수레를 이용해 고구려 전국으로 생산에 필요한 물품을 실어다 날랐고 특히 전쟁에 있어선 군수물자나 기타 보급물자를 아주 신속히 실어나른 것이다. 게다가 무거운 무기류와 갑옷류도 오랜 시간 축적된 수레 제조 기술로 쉽게 보급을 해준 것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수도 장안성에서 왕족을 포함한 20만명을 끌고 갔고 수레를 무려 1020대나 가져갔다. 치열한 전투와 고구려 후기에 일어난 평양에서의 반란 등을 감안하고 멸망 당시의 수도의 수레 숫자가 1020대였던 것을 감안해 볼 때, 전성기의 고구려 수레는 과연 몇대나 되며, 그 많은 수레로 대체 뭘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수레가 발달하니 도로망이 잘 짜여졌고 도로망이 잘 짜여지니 수레가 잘 다닐 수 있었다. 수레가 잘 다니니 상업이 활상화 되고 상업이 활성화되니 국가는 돈을 벌게 되었고 결국 고구려는 부자 국가가 된것이다. 고구려는 많은 자본을 바탕으로 쉴새없이 여러 곳에 투자하여 고구려를 진정한 강국인 문화강국, 군사강국이 된 것이다.
Ⅴ. 결론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소나 말이 끄는 수레가 많이 등장한다. 수백년 뒤인 조선시대에 수레는 사라지고 사람이 끌고 다니는 가마와 지게가 거리를 메웠다. 조선시대에는 길의 개념이 전반적으로 소극적이었다. 상업의 활용도로서 길에 대한 인식보다는 다른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할 경우, 이용될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는 육상의 운송수단은 오히려 고대국가인 고구려보다 못하였다. 이에 레포트를 쓰면서 분함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왜, 고대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발전하지 못하고 퇴보되고 말았는지를 말이다. 고구려의 그 발전상을 꼭 계승하여 오늘의 한국을 바꾸어 보고싶다.
◁참고자료▷
1. 그 많던 고구려의 수레는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1999, 김용만)
2. KBS 역사스페셜 "고구려의 재산목록 1호는 수레였다" 편
3. 그 외, 각 종 인터넷 사이트
고작 7만 마리의 말 밖에 가지고 있지 않던 조선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조선은 말이 없어 기병을 이용하지 못했고 전장에선 조선의 보병은 이웃 나라 기병의 적수가 되질 못했던 것이다. 허나 고구려는 말과 소를 이용해 수레를 이끌거나 아니면 말을 이용해 기병을 만들었다. 기병을 만들다 보니 적도 기병을 이용한다. 그래서 고구려는 더 강한 기병을 원했고 철기병을 생산하게 된다. 동천왕 시절에 위나라 관구검에게 철기5천으로 대적한다. 그럼 이 철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철은 무겁기 때문에 웬만한 무게에 잘 견딜 이동수단이 필요했다. 고구려는 당연히 자국에서 질좋고 성능좋은 수레를 이용해 철을 날랐을 것이다. 이걸 증명하듯 당나라 역사서에는 고구려와 수많은 철에 대한 교역을 했음을 피력하고 있다.
고구려가 전쟁을 잘한 이유는 숭무사상이 바탕이 되어서 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생산시설이 잘 짜여져 있어서 그랬다. 수많은 수레를 이용해 고구려 전국으로 생산에 필요한 물품을 실어다 날랐고 특히 전쟁에 있어선 군수물자나 기타 보급물자를 아주 신속히 실어나른 것이다. 게다가 무거운 무기류와 갑옷류도 오랜 시간 축적된 수레 제조 기술로 쉽게 보급을 해준 것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수도 장안성에서 왕족을 포함한 20만명을 끌고 갔고 수레를 무려 1020대나 가져갔다. 치열한 전투와 고구려 후기에 일어난 평양에서의 반란 등을 감안하고 멸망 당시의 수도의 수레 숫자가 1020대였던 것을 감안해 볼 때, 전성기의 고구려 수레는 과연 몇대나 되며, 그 많은 수레로 대체 뭘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수레가 발달하니 도로망이 잘 짜여졌고 도로망이 잘 짜여지니 수레가 잘 다닐 수 있었다. 수레가 잘 다니니 상업이 활상화 되고 상업이 활성화되니 국가는 돈을 벌게 되었고 결국 고구려는 부자 국가가 된것이다. 고구려는 많은 자본을 바탕으로 쉴새없이 여러 곳에 투자하여 고구려를 진정한 강국인 문화강국, 군사강국이 된 것이다.
Ⅴ. 결론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소나 말이 끄는 수레가 많이 등장한다. 수백년 뒤인 조선시대에 수레는 사라지고 사람이 끌고 다니는 가마와 지게가 거리를 메웠다. 조선시대에는 길의 개념이 전반적으로 소극적이었다. 상업의 활용도로서 길에 대한 인식보다는 다른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할 경우, 이용될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는 육상의 운송수단은 오히려 고대국가인 고구려보다 못하였다. 이에 레포트를 쓰면서 분함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왜, 고대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발전하지 못하고 퇴보되고 말았는지를 말이다. 고구려의 그 발전상을 꼭 계승하여 오늘의 한국을 바꾸어 보고싶다.
◁참고자료▷
1. 그 많던 고구려의 수레는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1999, 김용만)
2. KBS 역사스페셜 "고구려의 재산목록 1호는 수레였다" 편
3. 그 외, 각 종 인터넷 사이트
추천자료
역사스페셜 - 고구려, 힘의 원천이 된 수레
고구려 문화
고구려과학사의이해
[고구려벽화, 고분벽화,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 고분벽화의 분류와 특성 및 고구려 고분벽...
[고대가요][황조가]고구려 고대가요 황조가의 배경설화, 고구려 고대가요 황조가의 원문, 고...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어디로 갔을까
고구려 고분벽화 의의와 특징, 고구려 고분벽화 시대별 분류, 고구려 고분벽화 분포, 고구려 ...
[고구려 고분벽화]고구려 고분벽화의 성격,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색, 고구려 고분벽화의 분류...
[삼국시대 건축][고구려시대 건축][사원건축][불교사원][불사건축]삼국시대 건축의 특징,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