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지(十二支)에 대하여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는데, 높이 6m, 지름 23m의 원형봉토분으로 호석이 설치되어 있고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탱석(撑石)에는 두칸건너 하나씩 무복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조각 수법은 신라 십이지신상의 조각품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이다. 통일신라 왕릉의 대표적인 이 괘릉의 능묘제도는 당나라와 의 문물 교류를 통하여 그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나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배치하는 것은 신라인의 창안이며 뛰어난 조각수법은 당시 신라인의 고도로 발달한 예술적 경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평가된다. 이 능의 주인은 신라 38대 원성왕 (신라 제38대 785 ~ 798)이라고 추정된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은 무열왕 7년(660)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 총대장으로 계백장군이 거느린 백제군을 황산벌에서 무찔러 백제를 멸망시키고, 문무왕 8년(668)에도 신라군 총사령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군사도 물리침으로써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다.
김유신장군묘에 있는 12지신상은 괘릉, 현덕왕릉, 성덕왕릉 등의 그것과 비교하여 조각의 우수성이 뛰어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김유신장군묘 12지신상밑 땅속에선 납석 십이지신상 3점이 발견되었는데, 각각 돼지.말.토끼를 양각한 것으로 조각솜씨가 12지신상보다 오히려 뛰어나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은데 반해 이 납석상은 무복을 입고 있으며 비늘 갑옷이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
무덤 안에 흙으로 만든 토용, 토우 등과 같이 묻은 것은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당시의 문화 현상으로 볼 수 있지만, 신라만의 새롭고 독특한 무덤 둘레 12지신상은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되었을까?
그것은 통일 후의 권력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즉 12지신상들이 왕릉을 각 방위와 시간에 틈이 없이 수호한다는 뜻이 있지만, 경덕왕 때에 한층 강화된 전제 왕권을 밖으로 과시하려는 뜻도 담겨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변형 발전시켜 나갔던 점은 통일 신라 문화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으뜸가는 점이다.
이러한 십이지신상은 능묘의 둘레 돌에 뿐만 아니라 불교 건축·조각에도 이어져 석탑, 부도, 석등 등에도 조각되었고, 비석 받침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한양(지금의 서울)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이곳에 경복궁을 지었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전소되는 비운을 맞았으며 그 후 왕궁으로서 불길하다는 이유로 273년간이나 중건되지 못하였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중건에 착수하여 고종 5년(1868)에 창건 당시의 규모로 복원되었다.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임금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던 곳이자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던 법전으로, 조선시대 정전건축 가운데 가장 높고 큰 규모로서 광대한 실내공간을 형성하고 있다.1394년 태조 3년에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67년 고종 4년에 재건된 이 건물은 "아침에 정사를 보고 낮에 의견을 물으며 저녁에 정령을 닦고 밤에 몸을 편안히 한다"는 <시경>의 문구를 인용해 임금이 부지런히 정사를 돌본다는 뜻으로 정도전이 근정전이라 이름지었다. 근정전 남쪽 계단을 오르면 넓은 화강석 월대가 펼쳐지고, 사방을 돌아가면서 돌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동서남북 계단으로 통하는 월대의 문로주에 화강석으로 다음은 한쌍의 동물석상들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사방신과 십이지상이다. 위층에는 주작, 청룡, 현무, 백호상이 있고. 아래층에는 방향에 맞게 제자리를 찾아 호랑이, 소, 토끼, 쥐, 닭, 원숭이 등 십이지신상이 있다. 십이지상 가운데 소는 정각 1시 방향에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4시 방향에 앉아 있다.
옛날부터 천체현상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시(時)를 알려주는 일은 제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세종대왕 14년(1432년) 장영실에 의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시계인 자격루가 완성되었다.
자격루는 하루를 12등분하여 매 시의 정각에 이르면 상층의 사시신(司時神)이 한번 종을 울린 후 곧바로 아래층에서 시(時)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십이지신인형이 종을 울리며 등장하였다. 청각을 이용한 보시만이 아니라 시간을 눈앞에 전시하였던 셈이다. 현재 시보장치는 소실되었고 물시계 항아리만이 국보 2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가 만원짜리 지폐에서 볼 수 있는 '물시계'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4.06.19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603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