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릉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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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 왕릉의 변화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신라 왕릉의 시기별 모습
1. 신라왕릉의 변화
2. 積石木槨墳과 橫穴式石室墳

Ⅲ. 통일신라의 陵墓制度
1. 배치와 기본형태
2. 陵과 관련된 石彫物
3. 墓碑

Ⅳ. 맺음말

본문내용

보호하고 장엄하게 하기 위해 그 주위에 배치한 장식물로, 능묘 주위에 석조상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 전한시대부터 시작되어 후한시대에 이으러 일반화 되었다. 대개 석인은 수에 재한이 있어서 왕릉에는 10쌍을 마주 보게 배치하지만 왕족이나 신하의 묘에는 1쌍을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형상은 수호하던 수문장의 모습에서 점차 冠(관)을 쓰고 칼을 쥔 文官(문관)과 武官(무관)을 본뜬 문무석인으로 변했다. 석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石獅子(석사자)는 당 · 송 대까지는 왕릉에만 한정하여 1쌍을 세우고, 왕족이나 신하의 묘에는 石虎(석호)나 石羊(석양) 등으로 장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唐(당) 제도를 따라 대체로 왕릉에만 석조 조각상을 세웠는데 석인은 冠檢形(관검형)의 모습으로 마주 서 있고 그 옆에 胡人形(호인형)의 수문장 1쌍을 첨가한 것이 특징이다. 석수는 사자가 대부분이며 특히 능묘 주위의 호석에 새겨진 巫服(무복)을 입은 십이지상은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3. 墓碑(묘비), 龜趺(귀부)
- 귀부는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로 통일신라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삼국통일과정에서 당의 문화유입 때 함께 들어와 변화 ·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구조를 살펴보면, 碑身(비신)을 중심으로 하여 基壇(기단)을 거북의 모습으로 조각하고, 비신 위에는 용이 새겨진 首(이수) 건축물(建築物)이나 공예품(工藝品)에서 뿔 없는 용의 서린 모양을 아로 새긴 형상(形狀). 흔히 종정(鐘鼎)이나 궁전(宮殿)의 섬돌ㆍ이기(器)ㆍ인장(印章)ㆍ대구(帶鉤)ㆍ비(碑)머리 등(等)에 쓰임. 이두(頭)
가 얹혀 있다.
Ⅳ. 맺음말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의 왕릉은 적석목곽분에서 통일기를 즈음하여 한강유역 확보와 그 이북지역인 고구려 영역에서의 진출, 수 · 당과의 빈번한 교통으로 횡혈식석실분으로 변화하게 된다. 입지에 있어서도 분지에서 구릉지로 옮겨가며 능의 크기가 축소되고 부장품도 간소하게 변화된다.
신라왕릉의 외형은 당의 능묘제도의 유입으로 능과 관련된 석조물이 없는 분묘 형식을 취하다가 통일기를 즈음하여 봉분에 호석을 두르고 능역 전면에 혼유석 · 석사자 · 문인상 · 무인상 · 귀부 등을 배치하며, 특히 통일기에는 능과 관련된 석조물에 십이지신강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라의 왕릉들 중 몇 기는 사찰과 관련되어 사찰이 왕릉표시의 시준이 되기도 하며, 일부 왕의 장례가 사찰에서 행해짐을 시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당시 통일기를 즈음하여 신라사회가 격변하고 있었으며, 또한 외래의 영향도 많이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참고 문헌
● 김환대, 『신라왕릉(경주지역 왕릉 현장기행)』, 한국학술정보, 2007
● 김환대, 『신라의 십이지신상』, 한국학술정보, 2009
● 이종선, 『고신라 왕릉연구』, 학연문화사, 2000
● 최병현, 『신라고분연구』, 일지사, 2004
● 이종호, 『경주왕릉(천년 왕국 신라의 역사로 들어가는 문)』, 열린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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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9.11.05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9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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