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서론
II. 본론
1. 비문의 현황
2. 광개토왕릉비문에 관한 기록 및 재견해
3. 비문의 전체적인 구성
4. 비문의 내용
(1) 永樂 5년 乙未條 - 碑麗 征土
(2) 辛卯年 記事
- ① 일본 학계의 주장
② 정인보의 주장
③ 정두희, 이기백의 주장
④ 이진희의 碑文改作說
⑤ 濱田耕策의 前置文說
(3) 永樂 6년 丙申條 - 百殘 征土
(4) 永樂 8년 戊戌條 - 息愼 征伐
(5) 永樂 9년 己亥條 - 百殘․倭 화통 및 新羅 侵攻
(6) 永樂 10년 庚子條 - 高句麗의 新羅 救援
(7) 永樂 14년 甲辰條 - 帶方界 戰鬪
(8) 永樂 17년 丁未條 - 百殘 征土
(9) 永樂 20년 庚戌條 - 東夫餘 征土
5. 고구려 중심의 천하사상
III. 결론
II. 본론
1. 비문의 현황
2. 광개토왕릉비문에 관한 기록 및 재견해
3. 비문의 전체적인 구성
4. 비문의 내용
(1) 永樂 5년 乙未條 - 碑麗 征土
(2) 辛卯年 記事
- ① 일본 학계의 주장
② 정인보의 주장
③ 정두희, 이기백의 주장
④ 이진희의 碑文改作說
⑤ 濱田耕策의 前置文說
(3) 永樂 6년 丙申條 - 百殘 征土
(4) 永樂 8년 戊戌條 - 息愼 征伐
(5) 永樂 9년 己亥條 - 百殘․倭 화통 및 新羅 侵攻
(6) 永樂 10년 庚子條 - 高句麗의 新羅 救援
(7) 永樂 14년 甲辰條 - 帶方界 戰鬪
(8) 永樂 17년 丁未條 - 百殘 征土
(9) 永樂 20년 庚戌條 - 東夫餘 征土
5. 고구려 중심의 천하사상
III. 결론
본문내용
당위성으로 보았다. 또 이 같은 당위성은 고구려가 천제의 아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설화와 천하와 천자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 천하를 천자와 그 혈통을 잇는 천손이 통치하는 일을 당연한 일로 보았다. 즉, 고구려가 천손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천하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비문은 서술 처음부터 천자의 아들인 추모왕 이야기를 함으로써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주변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고구려가 모든 주변국과 교류를 맺고 있는 것에 비해 주변국의 교류는 고구려에 한정되어 주변국간의 교류 등은 인정되지 않는다. 주변국이 그 규정을 어기고 고구려 이외의 나라와 교류를 갖게 되는 것은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되어 고구려에게 당연하기 정토당하게 되는 것이다.
III. 결론
지금까지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른 고구려의 정토과정 및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은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의 위업을 이룩한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리는 頌德碑로서 우리나라 고대사뿐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북아시아사의 귀중한 금석문 사료이다. 우리는 능비를 통해 고구려가 주변국가에 대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국내영토의 지배를 통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완성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우리는 광개토대왕의 팽창정책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인의 天下觀등 고구려사의 발전과정은 물론 동아시아세계의 국제관계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학계에서는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견해와 논란들이 나오고 있다. 이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신묘년 기사에 대해 여러 견해를 자세하게 알아보았는데, 이는 일본의 주장인 임나일본부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료라 더욱더 집중되고 있다. 아직까지도 논란 중이지만, 현재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각 견해들마다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비문에 대한 더욱더 세심한 연구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구려적 천하관은 어떻게 보면 분단된 우리나라 현실을 일깨워 준다.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성격이 같은 동일 세력권인 백잔, 신라, 동부여 등을 통일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잃어버린 옛땅 만주에 있는 광개토왕릉비를 보며 남북분단의 극복하려는 민족의 통일감을 일깨워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참고문헌 ☆
손영종,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중심, 2001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1994
이형구박노희, <공개토대왕릉비 신연구>, 양지사, 1986
권오엽, 논문집 26권 2호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9
김태식, 역사비평 1997년 봄호(37권) <광개토왕릉 비문 논쟁과 임나일본부설>, 역사문제연구소, 1997
박종대, 加羅文化 3집 <廣開土王陵碑文 解釋의 問題點(上) : 日本學界의 對倭記錄에 대한 釋文을 中心으로>, 慶南大學校 博物館 加羅文化硏究所, 1985
주변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고구려가 모든 주변국과 교류를 맺고 있는 것에 비해 주변국의 교류는 고구려에 한정되어 주변국간의 교류 등은 인정되지 않는다. 주변국이 그 규정을 어기고 고구려 이외의 나라와 교류를 갖게 되는 것은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되어 고구려에게 당연하기 정토당하게 되는 것이다.
III. 결론
지금까지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른 고구려의 정토과정 및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은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의 위업을 이룩한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리는 頌德碑로서 우리나라 고대사뿐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북아시아사의 귀중한 금석문 사료이다. 우리는 능비를 통해 고구려가 주변국가에 대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국내영토의 지배를 통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완성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우리는 광개토대왕의 팽창정책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인의 天下觀등 고구려사의 발전과정은 물론 동아시아세계의 국제관계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학계에서는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견해와 논란들이 나오고 있다. 이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신묘년 기사에 대해 여러 견해를 자세하게 알아보았는데, 이는 일본의 주장인 임나일본부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료라 더욱더 집중되고 있다. 아직까지도 논란 중이지만, 현재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각 견해들마다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비문에 대한 더욱더 세심한 연구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구려적 천하관은 어떻게 보면 분단된 우리나라 현실을 일깨워 준다.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성격이 같은 동일 세력권인 백잔, 신라, 동부여 등을 통일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잃어버린 옛땅 만주에 있는 광개토왕릉비를 보며 남북분단의 극복하려는 민족의 통일감을 일깨워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참고문헌 ☆
손영종,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중심, 2001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1994
이형구박노희, <공개토대왕릉비 신연구>, 양지사, 1986
권오엽, 논문집 26권 2호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9
김태식, 역사비평 1997년 봄호(37권) <광개토왕릉 비문 논쟁과 임나일본부설>, 역사문제연구소, 1997
박종대, 加羅文化 3집 <廣開土王陵碑文 解釋의 問題點(上) : 日本學界의 對倭記錄에 대한 釋文을 中心으로>, 慶南大學校 博物館 加羅文化硏究所,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