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의 민중 그리고 새마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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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 시대의 민중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있도록 해야 후세에서도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존의 편협한 자료수집 하에서 작성된 평가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일부분이기 때문에 전체로 확장시킬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공동조사 등을 통해 전체를 대표할만한 자료가 수집된 후에 새마을 운동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본다.
새마을 운동의 한계
박정희 시대 국가권력이 사회 모든 영역과 집단을 포섭하거나 ‘국민’으로 불러낼 수는 없었다.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상대적으로 미약한 저항운동은 국가로 하여금 대중의 동의보다는 손쉬운 강제를 선호하게 하면서 유래 없는 폭압의 시대를 만들었다. 나치즘이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낸 것에 비해 박정희 정권은 사실상 유사파시즘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치즘과 달리 폭압에 따른 저항은 결국 박정희 정권을 내부적으로 붕괴시켰다. 특히 산업화에 따른 ‘새로운 계급’ 노동자의 등장은 박정희식 성공의 반영이자 ‘그 무덤을 파는’ 주체가 되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박정희를 죽음으로 몰아 간 지배 계급의 분열은 피지배 계급의 저항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저항 또는 완전한 것일 수는 없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 편 / 인물에서 시대로 지평 넓힌 강준만 비평
박정희 정권의 종말
새마을 운동이 바탕이 된 인명을 돌보지 않는 박정희식 ‘조국근대화’는 무서운 속도로 효과를 냈다. 이해에 ‘수출10억달러 고지’를 조기에 점령한 박정희는 곧바로 “중화학공업화의 깃발”을 들었다. 73년 울산석유화학공단과 포항종합제철 준공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끌어낸 한국경제는 77년 수출 100억달러 목표를 3년 앞당겨 달성했다. 박정희는 일기에 “정부와 우리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의지의 결정이요, 승리”라고 썼다. 그러나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는 짙었다. 농촌과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일용직 노동자로, 봉제공장 직공으로 빨려들었다. 삶의 밑바닥에 떨어진 ‘공돌이’ ‘공순이’들은 극심한 노동착취와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그 때 자신의 몸을 불살라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린 사람이 전태일이었다. ‘전태일 분신’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각성을 낳고 현실참여를 독려했다. 이후 70년대는 ‘산 박정희’와 ‘죽은 전태일’ 사이의 긴 싸움의 연속이었다. 결국 박정희 시대는 내부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1979년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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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4.06.26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7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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