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상군 지방으로 쫓겨나 변경 지방의 군대를 감독하고 있었다. 당시 상군 지방의 군사를 지휘했던 사람은 명장 몽염이었다. 한편 시황제는 작은 아들 호해(胡亥)를 귀여워하여 이번 시찰에도 아들 중 유일하게 동행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시황제가 사구 지방에 이르자 갑자기 병이 깊어져 위독하게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자 그래도 믿을 건 장남뿐이었든지 황제는 조고를 시켜 맏아들 부소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편지는 봉해졌으나 사자를 보내기도 전에 황제는 죽고 말았다. 황제의 편지는 옥새와 함께 조고가 쥐게 되었다.
시황제의 죽음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으며 오직 호해와 이사, 조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는 여행 중에 황제가 죽었고 또 태자도 정식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죽음을 발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비밀에 부치게 했던 것이다. 유해는 수레에 안치된 채 시찰이 계속되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신하가 정사를 아뢰고 황제의 수라상도 올려졌다. 결재도 수레 안에 있는 환관이 수행하였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써, 군현제도를 확립한 절대적 왕권 중심의 통치자였다. 진나라 멸망이후에도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모두 채택한 탁월한 행정제도 였다. 후대의 관점에서 진시황을 보는 시각은 다분히 여러면이 부각되지만 가장 많이 얘기 되어지는 면은 불로장생을 꿈꾸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방궁과 시황릉을 세우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유례없는 독재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진시황의 진면목이 많이 가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시황은 중국 전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해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였으며, 동시에 도량형, 화폐, 거궤, 문자를 통일하는 등 사회, 경제, 문화제도까지 정비 통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도 탁월한 합리주의자이자 가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극단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아주 꼼꼼하게 정무에 힘쓰는 반면에, 거대건축을 세우거나 선약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극과 극의 이중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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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폭군'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그러나 한편 재평가 되어야 할 부분도 많다. 사실 역사적으로 그는 중국 최초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인물이다. 그 뿐 아니다. 문자와 화폐를 통일하고 전국적인 도로망을 건설했던 점 또한 높게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물론 그렇다고 폭정을 묵과할 수는 없다. 다만, 중국과 같이 거대한 땅을 지배하는 데는 매우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고, 대대적인 규모의 관개치수(灌漑治水)가 필요했던 그때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시황에 대한 관심이 요즘 들어 더욱 고조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무엇보다도 '영웅'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일 것이다. 많은 것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지만 중심점이 뚜렷하지 않은 때고, '모이는 힘'보다는 '분산되는 힘'이 더 큰 때가 요즘 아닌가. 혼돈은 여전하고 강력함은 부족한, 이를테면 '카리스마 결핍'을 겪고 있는 요즘 아닌가.
진시황 역시 영토뿐만 아니라 통일마니아라고 할 정도로 표준을 설정하는 데 집착한 인물이다. 그는 영토를 통일한 뒤 곧바로 주(周)의 봉건영주제를 버리고, 전국을 36개군으로 분할 통치하는 군현제를 시행했다. 최초의 중앙집권제인 것이다. 진시황의 군현제는 1911년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2,100년간 존속했다. 그리고 중앙집권에 기반해 도량형 달력 문자 법제를 통일했다. 뿐만 아니다. 차 바퀴의 폭까지 일률적으로 정하게끔 명령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당시의 도로는 바퀴 자국이 깊숙이 나서 마치 기차의 궤도처럼 되어 있었다. 차는 바퀴를 그 자국에 들여놓고 달리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7개국이 서로 물고 물어뜯는 전란의 시대에 각국은 다른 나라의 차가 자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다르게 해놓은 것이다. 진시황은 전국의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바퀴폭까지 통일시켜 교통 인프라를 혁신적으로 확충시킨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의 이런 다각적인 통일정책에 힘입어 진나라 이후 중국은 18세기까지 세계 역사 속에서도 최선진국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진시황의 이런 업적 때문인지 오늘날 중국의 영문표기인 China 역시 '진'(秦)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듯 중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으면서도 진시황은 한(漢) 이래 분서갱유로 상징되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격파탄자로 묘사돼왔다. 그러나 최근 진시황릉의 발굴을 계기로 그를 난세의 위대한 리더이자 역사의 건설자로 조명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필자는 역사자료를 엔진으로, 상상력을 연료로 한 타임머신을 타고 진시황과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억울하기 그지없을 역사의 평가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있었을 비사(秘事)들을 그의 육성으로 들어본다.
우선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진 제국을 성립시킨 진시황이 하늘에 제사(봉선)를 지내는 태산으로 찾아가 황제 취임 인터뷰를 요청했다.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그이기에 인터뷰가 쉽게 성사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우려는 그야말로 기우였다. 환관 조고에게 인터뷰 요청 의사를 들은 진시황은 예정된 일정을 마친 뒤 곧바로 회견할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왔다. 의외의 선선한 수락에 잠시 의아했지만 얼마 안가 그 이유를 얼추 짐작해볼 수 있었다. 진시황은 조금이라도 필요하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이다. 그것도 황제인 자기와 동등한 대우를 해주면서 말이다. 그의 이런 면모 때문에 그는 대량 사람 울료에게 오히려 최악을 평을 들은 일까지 있다.
시황제의 죽음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으며 오직 호해와 이사, 조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는 여행 중에 황제가 죽었고 또 태자도 정식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죽음을 발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비밀에 부치게 했던 것이다. 유해는 수레에 안치된 채 시찰이 계속되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신하가 정사를 아뢰고 황제의 수라상도 올려졌다. 결재도 수레 안에 있는 환관이 수행하였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써, 군현제도를 확립한 절대적 왕권 중심의 통치자였다. 진나라 멸망이후에도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모두 채택한 탁월한 행정제도 였다. 후대의 관점에서 진시황을 보는 시각은 다분히 여러면이 부각되지만 가장 많이 얘기 되어지는 면은 불로장생을 꿈꾸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방궁과 시황릉을 세우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유례없는 독재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진시황의 진면목이 많이 가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시황은 중국 전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해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였으며, 동시에 도량형, 화폐, 거궤, 문자를 통일하는 등 사회, 경제, 문화제도까지 정비 통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도 탁월한 합리주의자이자 가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극단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아주 꼼꼼하게 정무에 힘쓰는 반면에, 거대건축을 세우거나 선약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극과 극의 이중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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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폭군'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그러나 한편 재평가 되어야 할 부분도 많다. 사실 역사적으로 그는 중국 최초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인물이다. 그 뿐 아니다. 문자와 화폐를 통일하고 전국적인 도로망을 건설했던 점 또한 높게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물론 그렇다고 폭정을 묵과할 수는 없다. 다만, 중국과 같이 거대한 땅을 지배하는 데는 매우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고, 대대적인 규모의 관개치수(灌漑治水)가 필요했던 그때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시황에 대한 관심이 요즘 들어 더욱 고조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무엇보다도 '영웅'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일 것이다. 많은 것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지만 중심점이 뚜렷하지 않은 때고, '모이는 힘'보다는 '분산되는 힘'이 더 큰 때가 요즘 아닌가. 혼돈은 여전하고 강력함은 부족한, 이를테면 '카리스마 결핍'을 겪고 있는 요즘 아닌가.
진시황 역시 영토뿐만 아니라 통일마니아라고 할 정도로 표준을 설정하는 데 집착한 인물이다. 그는 영토를 통일한 뒤 곧바로 주(周)의 봉건영주제를 버리고, 전국을 36개군으로 분할 통치하는 군현제를 시행했다. 최초의 중앙집권제인 것이다. 진시황의 군현제는 1911년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2,100년간 존속했다. 그리고 중앙집권에 기반해 도량형 달력 문자 법제를 통일했다. 뿐만 아니다. 차 바퀴의 폭까지 일률적으로 정하게끔 명령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당시의 도로는 바퀴 자국이 깊숙이 나서 마치 기차의 궤도처럼 되어 있었다. 차는 바퀴를 그 자국에 들여놓고 달리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7개국이 서로 물고 물어뜯는 전란의 시대에 각국은 다른 나라의 차가 자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다르게 해놓은 것이다. 진시황은 전국의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바퀴폭까지 통일시켜 교통 인프라를 혁신적으로 확충시킨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의 이런 다각적인 통일정책에 힘입어 진나라 이후 중국은 18세기까지 세계 역사 속에서도 최선진국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진시황의 이런 업적 때문인지 오늘날 중국의 영문표기인 China 역시 '진'(秦)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듯 중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으면서도 진시황은 한(漢) 이래 분서갱유로 상징되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격파탄자로 묘사돼왔다. 그러나 최근 진시황릉의 발굴을 계기로 그를 난세의 위대한 리더이자 역사의 건설자로 조명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필자는 역사자료를 엔진으로, 상상력을 연료로 한 타임머신을 타고 진시황과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억울하기 그지없을 역사의 평가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있었을 비사(秘事)들을 그의 육성으로 들어본다.
우선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진 제국을 성립시킨 진시황이 하늘에 제사(봉선)를 지내는 태산으로 찾아가 황제 취임 인터뷰를 요청했다.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그이기에 인터뷰가 쉽게 성사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우려는 그야말로 기우였다. 환관 조고에게 인터뷰 요청 의사를 들은 진시황은 예정된 일정을 마친 뒤 곧바로 회견할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왔다. 의외의 선선한 수락에 잠시 의아했지만 얼마 안가 그 이유를 얼추 짐작해볼 수 있었다. 진시황은 조금이라도 필요하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이다. 그것도 황제인 자기와 동등한 대우를 해주면서 말이다. 그의 이런 면모 때문에 그는 대량 사람 울료에게 오히려 최악을 평을 들은 일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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