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Ⅱ. 본론1-이론적 고찰
1. 역사문화도시의 필요성
2. 역사문화의 종류와 보전형태 및 방법
3. 역사문화보존지침
Ⅲ. 본론2-사례연구
1. 북촌
2. 인사동
3. 대학로
4. 풍납토성
1. 역사문화도시의 필요성
2. 역사문화의 종류와 보전형태 및 방법
3. 역사문화보존지침
Ⅲ. 본론2-사례연구
1. 북촌
2. 인사동
3. 대학로
4. 풍납토성
본문내용
보행자의안전을 고려한 도로시스템 역시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차도는 대지 외각으로 돌게 하고 그 안쪽은 보행자 전용 도로를 설치함으로써 문화지구로서의 매력을 더욱 높인다. 이와 함께 선도적인 문호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래방 및 유흥시설의 유입을 억제하고 보조금이나 인센티브를 줘 극장이나 공연장, 카페 등의 문화시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마지막으로 효율적인 홍보게시판 관리 및 무분별한 포스터 부착 금지를 위한 단속이 필요하다.
4. 풍납지구
1) 입지현황
(1) 위치
서울 송파구 풍납동 96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서쪽은 한강이 흐르고 있고, 한강 건너편에 서북쪽으로 아차산성을 바라보고 있다. 남쪽으로는 작은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몽촌토성과 송파로 통하는 길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멀리 남한산성을 바라보고 있다 .
(2) 교통
버스: 420, 1007, 959,
지하철 2호선 성내역, 8호선 천호역
2) 역사적 의미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 몽촌토성은 1925년 대홍수 때 성내 남단에서 청동제 초두 2개가 발견되었고 1966년 서울대학교 고고학과 발굴조사에 의하여 토기 어망추, 개와, 꺽쇠, 석제 방추차, 숫돌, 타제석기 등의 삼국시대 유물 출토되어 삼국시대 초기에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특히 이 발굴 조사에서는 당시의 지표 또는 주거지을 찾아낼 수 있어 풍납동 토성은 단순한 방위를 위한 군사 시설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주거지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삼국시대의 다른 수도들은 문헌상으로나 유적상으로 보아 그 소재지가 모두 뚜렷하지만 유독 백제의 발상지로 초기의 국명이요 수도인 위례성에 대해서는 그 소재가 아직도 판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풍납토성이 위례성라고 보는 설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3) 풍납토성 현황
(1) 규모
풍납동 토성은 전체 토성의 면적이 총 26만 평 정도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웅대하다. 주위가 4km, 남북 약 3km, 동서 약 1km의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 있으나 한강에 면한 서벽은 1925년의 큰 홍수 때에 대부분 물에 떠내려가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토성의 동북쪽 귀퉁이와 동쪽 부분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1976년에 토성의 일부인 476m가 복원되어 현존 길이는 북벽이 약 300m, 동벽이 1,500m, 남벽이 200m 가량 된다.
(2) 형태
성벽의 축조 상태를 보면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북벽의 경우 외벽은 정상에서 약 2m 내려간 위치에서 1단의 넓은 단을 만들고 거기서부터는 경사를 죽여서 기반를 만들고 있으며 그 너비는 30m 가량 된다. 그리고 성벽은 돌이 섞이지 않은 고운 모래로 엷게 한층 한층 다져서 쌓아 올렸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며 북벽은 약 8m이다. 특히 서벽 외부와 동벽 외부가 패이고 물구덩이가 생긴 것은 축성 당시 축성용으로 흙을 채취하였기 때문이거나 성밖으로 둘러 판 못 인 해자라 생각된다. 동벽에는 거의 같은 간격으로 네 군데가 크게 뚫리고 외부로 통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성문 자리로 보여진다. 성 내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21m이고 가장 낮은 지점은 15.5m이지만 홍수로 인한 퇴적토로 2-3m 정도 높아졌다고 보고 있다.
<풍납토성의 모습>
(3) 시설물 현황
성벽의 표면은 현재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었다. 그 앞을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철재구조물을 설치해 놓았는데 펜스에 백제의 전통적인 문향을 새겨놓은 판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4) 주변형황
풍납토성은 잘 알려지지 않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찾아가는 길에 어떤 안내 표지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풍납토성 주변에 사는 많은 사람들도 풍납토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는데 풍납토성의 존재를 잘 몰랐다.
풍납토성 앞의 일부구간은 완충녹지로서 기능을 하기 위해 공원으로 가꾸어져 있었고 토성 주변에는 시장과 주택이 입지해 있었다.
<철제망> <완충녹지-공원>
4) 문제점
현재 풍납토성의 관리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풍납토성을 설명하는 안내서 앞은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그 주위로 포장마차촌이 형성되어 있어 지저분 했으며 문화재지구로서의 면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토성 주변으로는 시장과 주택가가 입지해 있는데 거리가 너무 가까워 토성에 대한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어 보였고 시장을 끼고 있는 토성 옆으로는 시장에서 나온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미관상 상당히 안 좋았다. 정문을 제외한 주위의 다른 곳에서는 접근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소규모 공원만이 하나 있을 뿐 그 이외의 시설들은 없어 시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소가 부족했으며 홍보의 미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내문 앞의 전경> <시장주거환경과 인접>
<시장에서 나오는 폐자재들> <공원 앞의 전경>
5) 대안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재래식 시장을 현대화 시키거나 일부 이전시킴으로서 주변환경 개선해야 한다. 주택의 경우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잘 협상해 주거지역을 옮길 수 있도록 유도하며 그 피해에 있어서는 철저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토성주변공간에는 완충녹지를 형성하며 문화재 보호함과 동시에 시민들에게 오픈스페이스를 제공해야겠다.
풍납토성의 경우 그 관광지로서의 매력보다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유물지의 보존과 그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다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문하는 사람들이 적고 인지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 관리상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유물지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역사유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철저한 문화재 관리가 필요하다. 또한 법적으로 문화재 관리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무원들과 관리 담당자들의 문화재 보호 노력 또한 필요하다.
4. 풍납지구
1) 입지현황
(1) 위치
서울 송파구 풍납동 96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서쪽은 한강이 흐르고 있고, 한강 건너편에 서북쪽으로 아차산성을 바라보고 있다. 남쪽으로는 작은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몽촌토성과 송파로 통하는 길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멀리 남한산성을 바라보고 있다 .
(2) 교통
버스: 420, 1007, 959,
지하철 2호선 성내역, 8호선 천호역
2) 역사적 의미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 몽촌토성은 1925년 대홍수 때 성내 남단에서 청동제 초두 2개가 발견되었고 1966년 서울대학교 고고학과 발굴조사에 의하여 토기 어망추, 개와, 꺽쇠, 석제 방추차, 숫돌, 타제석기 등의 삼국시대 유물 출토되어 삼국시대 초기에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특히 이 발굴 조사에서는 당시의 지표 또는 주거지을 찾아낼 수 있어 풍납동 토성은 단순한 방위를 위한 군사 시설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주거지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삼국시대의 다른 수도들은 문헌상으로나 유적상으로 보아 그 소재지가 모두 뚜렷하지만 유독 백제의 발상지로 초기의 국명이요 수도인 위례성에 대해서는 그 소재가 아직도 판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풍납토성이 위례성라고 보는 설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3) 풍납토성 현황
(1) 규모
풍납동 토성은 전체 토성의 면적이 총 26만 평 정도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웅대하다. 주위가 4km, 남북 약 3km, 동서 약 1km의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 있으나 한강에 면한 서벽은 1925년의 큰 홍수 때에 대부분 물에 떠내려가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토성의 동북쪽 귀퉁이와 동쪽 부분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1976년에 토성의 일부인 476m가 복원되어 현존 길이는 북벽이 약 300m, 동벽이 1,500m, 남벽이 200m 가량 된다.
(2) 형태
성벽의 축조 상태를 보면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북벽의 경우 외벽은 정상에서 약 2m 내려간 위치에서 1단의 넓은 단을 만들고 거기서부터는 경사를 죽여서 기반를 만들고 있으며 그 너비는 30m 가량 된다. 그리고 성벽은 돌이 섞이지 않은 고운 모래로 엷게 한층 한층 다져서 쌓아 올렸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며 북벽은 약 8m이다. 특히 서벽 외부와 동벽 외부가 패이고 물구덩이가 생긴 것은 축성 당시 축성용으로 흙을 채취하였기 때문이거나 성밖으로 둘러 판 못 인 해자라 생각된다. 동벽에는 거의 같은 간격으로 네 군데가 크게 뚫리고 외부로 통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성문 자리로 보여진다. 성 내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21m이고 가장 낮은 지점은 15.5m이지만 홍수로 인한 퇴적토로 2-3m 정도 높아졌다고 보고 있다.
<풍납토성의 모습>
(3) 시설물 현황
성벽의 표면은 현재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었다. 그 앞을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철재구조물을 설치해 놓았는데 펜스에 백제의 전통적인 문향을 새겨놓은 판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4) 주변형황
풍납토성은 잘 알려지지 않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찾아가는 길에 어떤 안내 표지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풍납토성 주변에 사는 많은 사람들도 풍납토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는데 풍납토성의 존재를 잘 몰랐다.
풍납토성 앞의 일부구간은 완충녹지로서 기능을 하기 위해 공원으로 가꾸어져 있었고 토성 주변에는 시장과 주택이 입지해 있었다.
<철제망> <완충녹지-공원>
4) 문제점
현재 풍납토성의 관리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풍납토성을 설명하는 안내서 앞은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그 주위로 포장마차촌이 형성되어 있어 지저분 했으며 문화재지구로서의 면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토성 주변으로는 시장과 주택가가 입지해 있는데 거리가 너무 가까워 토성에 대한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어 보였고 시장을 끼고 있는 토성 옆으로는 시장에서 나온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미관상 상당히 안 좋았다. 정문을 제외한 주위의 다른 곳에서는 접근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소규모 공원만이 하나 있을 뿐 그 이외의 시설들은 없어 시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소가 부족했으며 홍보의 미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내문 앞의 전경> <시장주거환경과 인접>
<시장에서 나오는 폐자재들> <공원 앞의 전경>
5) 대안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재래식 시장을 현대화 시키거나 일부 이전시킴으로서 주변환경 개선해야 한다. 주택의 경우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잘 협상해 주거지역을 옮길 수 있도록 유도하며 그 피해에 있어서는 철저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토성주변공간에는 완충녹지를 형성하며 문화재 보호함과 동시에 시민들에게 오픈스페이스를 제공해야겠다.
풍납토성의 경우 그 관광지로서의 매력보다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유물지의 보존과 그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다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문하는 사람들이 적고 인지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 관리상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유물지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역사유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철저한 문화재 관리가 필요하다. 또한 법적으로 문화재 관리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무원들과 관리 담당자들의 문화재 보호 노력 또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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