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송광사에 다녀와서...
○중요 문화재
○송광사라 불리는 까닭은?
○승보종찰의 유래
○창건과 및 중창기
○끝맺음....
○중요 문화재
○송광사라 불리는 까닭은?
○승보종찰의 유래
○창건과 및 중창기
○끝맺음....
본문내용
부터 주지 금당스님과 화주 취봉스님의 원력으로 5년 동안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제 8차 중창
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스님께서는 승보 종찰다운 도량을 가꾸어야 된다는 원력에, 사부대중이 뜻을 함께하여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 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차 중창 불사와 아울러 특기할 것은 외적인 불사와 함께 내적인 불사, 건물 불사와 함께 사상 불사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1987년 보조 사상 연구원을 발족하여 보조 사상 선양에 진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보조 사상 연구원은 [보조 전서]를 발간하고 매년 학술 회의를 개최하여 회지 [보조 사상]을 발간하고 있다.
송광사와 지눌국사에 대하여..
송광사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빼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분이 바로 송광사를 부흥 시킨 보조국사 지눌이다.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조계종의 개조. 속성 정(鄭). 호 목우자. 시호 불일보조. 서흥 출생이다. 1165년(의종 19) 출가하여 종휘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1182년(명종 12) 승과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여했다. 창평 청원사에서 6조(祖)의 《단경(壇經)》을 읽고 대각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1185년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선 ·교를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공산(公山)의 거조사에 머물면서 정혜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 ·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한편, 의천이 교로써 선 ·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종래의 구산선문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라 고쳐 제방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를 내렸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라 하고, 국사에 추증하였다.
저서에 《진심직설》《목우자수심결》 《계초심학입문》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염불요문》 《상당록》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이 있다.
끝맺음....
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송광사의 모든 구경을 마쳤다. 우리에게 구수한 사투리로 설명을 해 주신 스님은 나갈 때 다시 한 번 자기가 설명해 준 곳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고 갈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에 와서 궁금한 상황이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한번 자신을 불러 달라고 하시면해 맑게 웃으시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또 한 밖으로 나갈 때 다리 밑에 걸려 있는 엽접 두닙도 꼭 보고 가라고 일러 주셨다. 나와친구들은약사전과진영관을 다시 한 번 구경하고 대웅전에도 다시 한 번 눈여겨 보았다. 송광사를 뒤로 한 채 나오면서 세월각과천추각도 다시 한 번 유심있게 보고 다리 밑에 걸린 엽전 두닙을 보면서 방긋 웃었다. 친구들과 내려 오면서 다시 한 번 꼭 와서 제대로 천천히 보고 가야겠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2차 답사가 은근히 기대 되면 다시 한 번 그런 분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남았다...
제 8차 중창
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스님께서는 승보 종찰다운 도량을 가꾸어야 된다는 원력에, 사부대중이 뜻을 함께하여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 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차 중창 불사와 아울러 특기할 것은 외적인 불사와 함께 내적인 불사, 건물 불사와 함께 사상 불사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1987년 보조 사상 연구원을 발족하여 보조 사상 선양에 진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보조 사상 연구원은 [보조 전서]를 발간하고 매년 학술 회의를 개최하여 회지 [보조 사상]을 발간하고 있다.
송광사와 지눌국사에 대하여..
송광사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빼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분이 바로 송광사를 부흥 시킨 보조국사 지눌이다.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조계종의 개조. 속성 정(鄭). 호 목우자. 시호 불일보조. 서흥 출생이다. 1165년(의종 19) 출가하여 종휘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1182년(명종 12) 승과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여했다. 창평 청원사에서 6조(祖)의 《단경(壇經)》을 읽고 대각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1185년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선 ·교를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공산(公山)의 거조사에 머물면서 정혜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 ·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한편, 의천이 교로써 선 ·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종래의 구산선문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라 고쳐 제방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를 내렸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라 하고, 국사에 추증하였다.
저서에 《진심직설》《목우자수심결》 《계초심학입문》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염불요문》 《상당록》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이 있다.
끝맺음....
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송광사의 모든 구경을 마쳤다. 우리에게 구수한 사투리로 설명을 해 주신 스님은 나갈 때 다시 한 번 자기가 설명해 준 곳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고 갈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에 와서 궁금한 상황이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한번 자신을 불러 달라고 하시면해 맑게 웃으시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또 한 밖으로 나갈 때 다리 밑에 걸려 있는 엽접 두닙도 꼭 보고 가라고 일러 주셨다. 나와친구들은약사전과진영관을 다시 한 번 구경하고 대웅전에도 다시 한 번 눈여겨 보았다. 송광사를 뒤로 한 채 나오면서 세월각과천추각도 다시 한 번 유심있게 보고 다리 밑에 걸린 엽전 두닙을 보면서 방긋 웃었다. 친구들과 내려 오면서 다시 한 번 꼭 와서 제대로 천천히 보고 가야겠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2차 답사가 은근히 기대 되면 다시 한 번 그런 분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