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의 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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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최병도와 김정수 같은 인물은 실제로 존재할 수 있고 또 적잖은 전형적 의의로 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작품의 결말에 나타나는 그러한 형태의 인물들, 개화인으로 변신한 김옥련이나 최옥남 같은 형상이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관념의 모순된 종합, 그것이 이인직 소설의 구조적 괴리를 강제한 요인인 것이다.
여기에 이인직 반봉건 의식이 한국의 근대 내셔널리즘으로 전화되지 못한 원인이 있다. 극단적 서구 추종주의와 그 과정에서 나타난 현실의 몰각, 그리고 근대주체에 대한 관념적 파악이 이인직의 래디컬한 반봉건성을 공허하고 대안없는 중세 부정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이인직의 계몽주의로 하여금 시무적 정합성을 잃게 한 것이다.
【 결론 】
개화기에 나타난 신소설은 이 시기의 시대적 요청인 자유주의·인간주의를 구현하고 전통적 인습에 대항하는 근대문학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 소설의 사상적 배경이 된 개화사상의 일면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또 신소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바로 보호국 체제에서 식민지 체제로 넘어가는 때였다는 시기적 배경 때문에 그 나름의 제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소설이 나오기 시작한 1907-1908년에는 갑신정변, 갑오농민전쟁, 독립협회 등 일련의 정치운동이 모두 실패하고 러일전쟁을 겪은 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던 시기였다. 개화 지식인 계층이 애국계몽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의병 전쟁과 연합하지 못하고 계몽운동에만 한정되어 있던 때였다. 신소설들은 보호국 체제 아래서 식민지화를 앞둔 절박한 시기에 씌어진 작품들이면서도 민족적·국가적 위기 의식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개화기의 사회 양상은 안으로는 반봉건에 대한 저항과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에 대항하는 이중의 어려움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근대적 사회 체제를 지향해 갔다. 이러한 노력은 신분 계층에 따라 정학(正學)을 옹호하던 당시 유생들의 사상인 위정척사사상, 그리고 독립협회 등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사상, 민중의 개혁사상과 민족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동학사상 등으로 그 조류가 나뉜다. 이러한 사회 양상 속에서 개화기 문학은 형성되었고 그 대표적인 문학으로 신소설은 다양한 근대사상을 작품 속에서 형상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신소설은 자주적 국원 회복이나 강렬한 사회 비판 의식보다는 서구화의 피상적 모방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작품 <혈의 누>는 신학문 고취, 자유 연애 등의 근대화 사상을 주제로 들 수 있지만 그 주제는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작중 인물의 방황과 주체성 결여 등의 행동 양식과 그 주제 의식을 통해 근대화가 지향하는 것이 반청친일(反淸親日) 사상으로 귀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으로 제시되어 있는 청일전쟁은 역사적 진실로서의 청일전쟁과 다르게 왜곡되어 있다. 작품이 작가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면, 신소설 <혈의 누>를 통해 反淸親日 사상이 깊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혈의 누>가 문학 형식이나 서술 구조 등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한 것은 틀림없으나, 친일사상으로 국가와 민족을 매도했던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은세계>는 최병도를 통해 반봉건 사상으로 민중의 의식을 대변하는 민족주의적 작품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도 그와 함께 매국적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최병도라는 인물을 통해 알 수 있는 반봉건 의식은 단순한 축자적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속에 나타나 있는 반봉건 의식은 전반부에 나타나는 나약한 인물인 주인공 최병도의입을 빌려 지금의 체제는 붕괴될 걸이고 붕괴되어야 한다는 전통에 대한 부정과 망국론으로 이어지면서 친일적 저의(底意)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미국 유학을 한 옥순과 옥남 남매의 행동과 발언을 통해 고종 황제의 양위를 정치 대개혁이라 찬양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 전쟁을 무뢰지배의 행위라고 몰아붙이는 등의 반민(反民)·역사(歷史) 역행(逆行)적 발언을 하게 된다. 이런 매국적 발언은 1910년 한일합방을 앞두고 그의 정치적·사상적 저의를 작품 속에 노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렇듯 격동하는 구한말의 정치풍토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외래 사조에 민감했던 이인직은 3년간의 일본 유학과 두 차례의 도일(渡日)에서 느껴 온 일본의 면모에 대한 경이와 찬탄의
분출을 결국 정치와 작품의 양면에 쏟았다. 이인직은 당시 개화 지식인이 지향했던 문명 개화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정치적 상승을 노렸다. 그는 특히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당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김옥균의 사상을 이어 정치적 상승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친일문학은 1930년대 중반을 위시한 대일협력문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인직의 친일적 문학은 일제 말기 시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행했던 1930년대 후반의 친일 문인들보다 시대적 상황을 자의(自意)에 의해 왜곡, 작품 속에 형상화시킴으로써 그의 정치적·사상적 저의를 노출시키고 있기에 그 反淸親日 성격이 더욱 짙다는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를 통하여 고대소설과는 다른 문장의 서술 방법, 표현 구조로 새로운 시대 감각을 풍겨 주고 있고, 문체면에서도 묘사체 문장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소설을 천시하여 자신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던 당시에 당당히 이름을 내세워 소설가로서의 명예를 높인 점등의 긍정적인 면들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신문학사(新文學史)에 있어 이인직의 공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주적 국권 회복이나 강렬한 사회 비판 세력이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인직은 당시의 다수 민중이 원했던 개화 의지가 아니라 서구 지향을 개화라고 믿었던 특수 계급의 개화 시류에 휩쓸렸다. 당대의 역사 의식을 바탕으로 올바른 근대화로 민중을 계몽·지도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부여받았던 당대 개화 지식인 이인직은 자신의 잘못된 정치 의식과 신분에 대한 열등감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에 동조해 결국 그의 작품을 통해 反淸親日 행위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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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4.07.18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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