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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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에게 지배당하고 있다가 원이 무너지고 명나라가 들어서자, 그들은 통일이 안된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 있으면서 가끔 의식주를 얻고자 우리 변경을 침공하곤 하였다.
당시 김종서는 지략이 풍부하고 위풍이 있었으며 문무를 겸비하여 주위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았는데, 그를 신임한 세종은 국경지방을 개척함에 있어서 전적으로 김종서의 건의에 따랐다.
김종서 또한 책임감을 느끼고 세밀한 계획과 정확한 행동으로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하여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실로 김종서는 동북면의 방비 임무를 맡아 변경지방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함길도 절제사의 대임을 전후하여 15년여에 걸쳐 마침내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의 6진을 개척하여 남부의 주민을 이주시킴으로써 두만강변의 방비를 견고히 하고 우리의 영역으로 정착시켰던 것이다.
김종서는 국경지방을 개척하는 동안 장졸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특별히 힘썼는데, 한번 잔치를 열면 백명의 비장에게 각각 커다란 쇠다리를 주어 먹게 하였다.
한번은 어떤 이가 이를 두고 절제가 없다고 말하자 "이제야 다행히 국경을 개척하고 육진을 설치하여 옛 땅을 다시 찾았다. 십여년 동안 집을 떠나 살면서 이룩한 그들을 위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위안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이렇게 중대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을 박대한다면 장병들은 집 생각이나 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게 되어 사기가 떨어질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이곳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완전히 자리가 잡히지 않은 지금은 비록 쇠다리를 쓰지만, 완전히 잡힌 뒤에는 닭다리를 써도 충분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남달리 강직하고 호방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그가 장병들을 불러서 잔치를 베풀 때의 일이다. 밤이 깊어 주연이 무르익었는데 불만을 가진 어떤 사람이 활로 술통을 쏘아 맞춰 산산조각이 났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인지라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듯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였다.
그러나 김종서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자약하며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나 태연자약한 그의 태도에 모두 놀라 물었다. "장군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사한 놈이 나를 시험했을 뿐이다. 능히 어찌할 것인가!" 그의 호방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뿐만 아니라 김종서는 병서 `제승방략'을 지었다. 제승방략은 후에 이일이 증보하였다 하는데, 함경도 육진의 방수(防戍)를 논하여 각 진의 부락, 보루의 위치와 공수(攻守)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다음 고사를 적절하게 인증하고 있어 선조들이 남긴 병서들 가운데 귀중한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나중에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황보인 등과 함께 어린 왕 단종을 보필하다가 불행하게도 수양대군이 일으킨 1453년의 계유정난 때 맏아들 승규와 함께 희생되었으니, 그의 나이 64세 때의 일이었다.
장왕
장왕은 춘추시대 초나라 왕이었으며 춘추오패의 하나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연회를 베풀던 중 신하들의 갓끈을 모두 자르도록 했다는 절영(絶纓:갓끈을 자름)의 고사는 부하를 잘 다룬 일화로 매우 유명하다.
그는 즉위하고 나서 3년 동안 정사도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무희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던 그가 방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한 오거와 소종이라는 충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왕이 방탕에 빠지자 먼저 오거가 "새 한마리가 언덕에 앉아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지저귀지도 않았습니다.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하고 우회적으로 간한다. 그러나 장왕은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나, 날면 하늘을 치솟아 오를 것이고, 3년 동안 지저귀지 않았으나, 한번 지저귀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하고는 더욱더 황음에 빠져들었다. 이에 충신 소종이 입궐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또 다시 간하자 비로소 황음을 그만두고 정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군주로서 신하들을 잘 다룬 다음의 예화는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어느날 장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내려 주연을 베풀었다. 날이 저물어 술이 거나하게 올랐을 때, 바람이 불었던지 방안의 불이 갑자기 모두 꺼졌고, 이를 틈타 신하들에게 술을 따르던 허희라는 후궁의 옷을 끌어당기며 수작을 부리려 하는 신하가 있었다.
이때 허희가 그 신하의 갓끈을 잡아뜯고는 장왕에게 사실을 고하였다. "지금 불이 꺼진 틈에 어떤 자가 신첩의 옷을 잡아 당겼습니다. 신첩이 그 갓끈을 끊어 가지고 있습니다. 불을 밝히면 갓끈이 없는 사람이 범인이니 살펴 주시옵소서" 이 말이 떨어지자 장왕은 좌우에 이렇게 명하였다. "오늘 과인과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갓끈을 끊지 않은 자는 즐겁지 않음을 표시하는 자로다!(今日如寡人飮, 不絶冠纓者, 不爲樂也)." 이에 100명이 넘는 신하 모두가 자신의 갓끈을 끊고 나서야 불을 밝혔다. 이렇게 하여 끝까지 그 즐거운 분위기를 다한 채 마칠 수 있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나 장왕은 북의 진(晉)나라와 싸우게 되었는데, 항상 선두에 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용맹스럽게 싸우는 장수가 있어, 그의 활약으로 결국 진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상히 여겨 전쟁이 끝나고 장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과인이 덕박하여, 그대가 특이한 자라고 보지 않았었는데, 그대가 죽음을 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나선 것은 무슨 연유인고?"
그가 엎드려 대답하였다. "저는 마땅히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지난날 술에 취하여 무례를 저질렀을 때 왕께서 감추고 참아 주시며 제게 주벌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끝내 그 덕을 숨긴 채 왕께 보답을 하지 않는 짓은 감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늘 저의 간과 뇌를 땅에 드러내고 목의 피를 뿌려 그 은혜 갚기를 원해온 지 오래입니다. 신이 바로 그 잔치에서 갓끈이 끊겼던 놈입니다."
장왕의 넓은 도량, 순간의 기지, 그리고 깊이 신하를 아끼는 마음이 곧 그로 하여금 중국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었음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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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3페이지
  • 등록일2004.08.08
  • 저작시기2004.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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