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1 장 애국계몽운동
*발전과정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반제·반봉건 운동의 전개
제 2 장 애국계몽운동의 조직과 사상적 구조
제 3 장 정치·사회 결사운동
*정치·사회단체(표), 학회
제 4 장 언론·교육·종교운동
제 5 장 애국계몽운동의 확대와 항일 독립운동으로의 전환
*국채보상운동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일제탄압과 신민회 해체
*발전과정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반제·반봉건 운동의 전개
제 2 장 애국계몽운동의 조직과 사상적 구조
제 3 장 정치·사회 결사운동
*정치·사회단체(표), 학회
제 4 장 언론·교육·종교운동
제 5 장 애국계몽운동의 확대와 항일 독립운동으로의 전환
*국채보상운동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일제탄압과 신민회 해체
본문내용
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다. 제1심 판결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105인 가운데 6명만이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사건이 일제의 날조에 의한 것임이 입증되고 있다.
결국 <105인 사건>에 의해 신민회는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으며, 이와 함께 을사조약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던 계몽운동도 그 매듭을 짓게 되었다.
3. 애국계몽운동의 성격과 의의
한말의 계몽운동은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발전해온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을 계승하여,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식민지화의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에 전개된 반침략적 반봉건적 성격을 지닌 민족운동의 한 형태였다. 계몽운동은 1904년 노일전쟁, 한일의정서, 한일협약 등을 계기로 일어났다. 계몽운동은 사상적으로는 개화사상을 기본적으로 계승하고 있었으나, 1907년 8월부터 계몽주의자들은 좌파와 우파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중 좌파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당시의 객관적 정세와 관련하여 종래의 계몽운동을 단순한 개혁운동으로의 성격을 넘어서 반침략적 구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또 사상적으로도 초기 개화사상이 지녔던 여러 가지 한계들을 극복하여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당시에는 주권회복을 위해 전국 각지에 전개되었던 애국적 반일운동의 또 다른 한 조류로서 의병투쟁이 있었다. 한말의 계몽운동은 이 의병투쟁과 함께 일제침략기의 항일 운동의 양대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의병투쟁이 일제와 직접적인 투쟁을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일종의 사상적 준비를 담당하는 문화운동이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따라서 신민회가 중심이 된 해외 무장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제외한다면 당시 계몽운동의 방향도 민중들을 계몽하기 위한 교육에 역점이 두어졌으며, 계몽운동가들의 활동은 주로는 언론, 종교, 교육운동 등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계몽운동세력의 사상적 요체는 사회진화론과 거기에 대응되는,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한 자강독립론이었으며, 그들은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실력양성을 위한 식산흥업의 실시, 신교육의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계몽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고 그 세력을 정치적으로 결집하기 위해서 각종사회단체와 학회 등을 결성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합법단체로서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가 있었고,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있었다.
계몽운동가들은 사회 각 방면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나라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민중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비록 실패는 하였지만 한때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전국적 규모의 대중운동을 일으켜 민중들의 반일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분화된 좌파 계몽운동가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합법운동의 한계를 자각하자 비밀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일제와의 투쟁에 있어 보다 적극적이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강점에 앞서 독립군기지를 창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야말로 후일 의병투쟁과 함께 일제시기 독립군운동의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한말계몽운동은 또한 다음과 같은 한계들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당시 계몽운동가들은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자주적 근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나, 그 근대화의 구체적 내용이 철저하게 대중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향에서 제시되지는 못하였다. 즉 그들은 봉건적 토지제도의 개혁에 대해서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까닭에 계몽운동은 대중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릴 수 없었다.
또한 계몽운동의 주도 세력들은 그들의 활동을 애국정신과 선진지식을 보급하는 정도에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을 혁명적인 투쟁으로 이끄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지도층 자체가 통일적 역량으로 결속되지 못하고 편협한 지방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계몽운동이 주로는 서북 및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반면에 삼남지방에서는 오히려 저조한 상황을 보인 데에도 이러한 원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한말계몽운동의 일부 세력은 일제의 통감정치에 대하여 잘못된 기대를 갖거나, 일제의 침략정책에 이용되거나, 심지어는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근대화 운동의 범위를 문화운동으로만 제한한 데에서 비롯된 근본적 한계이기도 하며, 그들의 이같은 잘못된 인식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까지 일제와의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실력양성과 준비만을 내세우는 개량주의운동으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량주의운동은 진정한 민족운동이 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해주는 구실을 제공해 줄뿐이었다.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한계들로 인하여 한말의 계몽운동은 처음부터 의병투쟁과 합류하지 못하고 그와는 별도로 발전해 나갔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일제의 철저한 정치적 탄압 속에서 문화운동의 한계가 보다 분명해지면서 일부 계몽운동가들도 의병투쟁을 지지하고 또 일부 거기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계몽운동은 의병투쟁과의 연계 아래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한말의 계몽운동이 의병투쟁과 연계를 이루지 못하고 양자의 운동이 별도로 전개된 것은 당시 항일 구국투쟁이 지녔던 가장 큰 약점의 하나였다. 결국 이것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쳐 투쟁하지 못했던 한 요인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말의 계몽운동은 우리나라 민족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계몽운동은 당시 대중을 계몽하여 민족적 자각을 높여 주었다. 세계 각국의 실상을 알려 당시 구한국의 낙후성을 깨우치게 하는 한편, 민족적 위기 속에서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뿐만 아니라 계몽운동은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고자 하는 일제의 책동으로부터 민족 문화를 지켜냄으로써 근대적인 민족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계몽운동은 그 일련의 활동 속에서 의병투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며, 신민회의 독립군기지창건운동과 같이 민족운동의 새로운 좌표 설정에 기여한 바가 지대하였다.
결국 <105인 사건>에 의해 신민회는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으며, 이와 함께 을사조약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던 계몽운동도 그 매듭을 짓게 되었다.
3. 애국계몽운동의 성격과 의의
한말의 계몽운동은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발전해온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을 계승하여,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식민지화의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에 전개된 반침략적 반봉건적 성격을 지닌 민족운동의 한 형태였다. 계몽운동은 1904년 노일전쟁, 한일의정서, 한일협약 등을 계기로 일어났다. 계몽운동은 사상적으로는 개화사상을 기본적으로 계승하고 있었으나, 1907년 8월부터 계몽주의자들은 좌파와 우파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중 좌파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던 당시의 객관적 정세와 관련하여 종래의 계몽운동을 단순한 개혁운동으로의 성격을 넘어서 반침략적 구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또 사상적으로도 초기 개화사상이 지녔던 여러 가지 한계들을 극복하여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당시에는 주권회복을 위해 전국 각지에 전개되었던 애국적 반일운동의 또 다른 한 조류로서 의병투쟁이 있었다. 한말의 계몽운동은 이 의병투쟁과 함께 일제침략기의 항일 운동의 양대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의병투쟁이 일제와 직접적인 투쟁을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일종의 사상적 준비를 담당하는 문화운동이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따라서 신민회가 중심이 된 해외 무장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제외한다면 당시 계몽운동의 방향도 민중들을 계몽하기 위한 교육에 역점이 두어졌으며, 계몽운동가들의 활동은 주로는 언론, 종교, 교육운동 등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계몽운동세력의 사상적 요체는 사회진화론과 거기에 대응되는,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한 자강독립론이었으며, 그들은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실력양성을 위한 식산흥업의 실시, 신교육의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계몽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고 그 세력을 정치적으로 결집하기 위해서 각종사회단체와 학회 등을 결성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합법단체로서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가 있었고,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있었다.
계몽운동가들은 사회 각 방면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나라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민중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비록 실패는 하였지만 한때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전국적 규모의 대중운동을 일으켜 민중들의 반일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분화된 좌파 계몽운동가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합법운동의 한계를 자각하자 비밀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일제와의 투쟁에 있어 보다 적극적이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강점에 앞서 독립군기지를 창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야말로 후일 의병투쟁과 함께 일제시기 독립군운동의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한말계몽운동은 또한 다음과 같은 한계들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당시 계몽운동가들은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자주적 근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나, 그 근대화의 구체적 내용이 철저하게 대중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향에서 제시되지는 못하였다. 즉 그들은 봉건적 토지제도의 개혁에 대해서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까닭에 계몽운동은 대중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릴 수 없었다.
또한 계몽운동의 주도 세력들은 그들의 활동을 애국정신과 선진지식을 보급하는 정도에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을 혁명적인 투쟁으로 이끄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지도층 자체가 통일적 역량으로 결속되지 못하고 편협한 지방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계몽운동이 주로는 서북 및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반면에 삼남지방에서는 오히려 저조한 상황을 보인 데에도 이러한 원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한말계몽운동의 일부 세력은 일제의 통감정치에 대하여 잘못된 기대를 갖거나, 일제의 침략정책에 이용되거나, 심지어는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근대화 운동의 범위를 문화운동으로만 제한한 데에서 비롯된 근본적 한계이기도 하며, 그들의 이같은 잘못된 인식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까지 일제와의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실력양성과 준비만을 내세우는 개량주의운동으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량주의운동은 진정한 민족운동이 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해주는 구실을 제공해 줄뿐이었다.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한계들로 인하여 한말의 계몽운동은 처음부터 의병투쟁과 합류하지 못하고 그와는 별도로 발전해 나갔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일제의 철저한 정치적 탄압 속에서 문화운동의 한계가 보다 분명해지면서 일부 계몽운동가들도 의병투쟁을 지지하고 또 일부 거기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계몽운동은 의병투쟁과의 연계 아래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한말의 계몽운동이 의병투쟁과 연계를 이루지 못하고 양자의 운동이 별도로 전개된 것은 당시 항일 구국투쟁이 지녔던 가장 큰 약점의 하나였다. 결국 이것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쳐 투쟁하지 못했던 한 요인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말의 계몽운동은 우리나라 민족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계몽운동은 당시 대중을 계몽하여 민족적 자각을 높여 주었다. 세계 각국의 실상을 알려 당시 구한국의 낙후성을 깨우치게 하는 한편, 민족적 위기 속에서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뿐만 아니라 계몽운동은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고자 하는 일제의 책동으로부터 민족 문화를 지켜냄으로써 근대적인 민족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계몽운동은 그 일련의 활동 속에서 의병투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며, 신민회의 독립군기지창건운동과 같이 민족운동의 새로운 좌표 설정에 기여한 바가 지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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