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태왕 고구려남진정책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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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광개토호태왕 능비와 남진 실상

1).호태왕과 능비 2).비문에 나타난 남진 실모

3. 4∼5세기 남진 정책과 의의

4. 맺음말

본문내용

족사에서 내치의 기초 위에 한반도 중심으로 우뚝 솟은 고구려의 위용과 의의를 대강 살폈다. 이에 남진정책은 반도 중앙지대에 파고들어 터를 잡고 대륙과 해양까지 아울러 장악하게 되는 당시 나름의 최상 방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고구려 남진 발전론은 이리하여 시류 대세와는 달리 남진 성격, 내정정비, 발전 방향성 내지 시기구분문제와 고구려사 인식의 근본을 바로 찾는데 상당히 애를 쓴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능비가 남녘 공취 성·촌을 특히 돋보이게 열거하고, 또 훈적 총평으로 「국부민은 5곡풍숙」(국부민은 오곡풍숙)이라는 알찬 발전 쪽을 찬양하여 쓴 까닭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광개토경'의 본의나 '백잔'과 '왜구' 호칭에 배어 있는 증오 질타의식, 그리고 상당수의 일인과 내국인의 구구한 비문 해석 기도 등등의 문제점을 원천적으로 풀려면 정치 경제사 못지 않게 문화 사상사적 접근이 소망스러울 듯 생각된다.
) 호태왕비의 실상과 동떠러진 내외인의 분석이 오히려 드셋던 그 동안의 상황은 우리의 기구한 근대사 운명과 맞물려 양생된 것이지만, 가령 신묘년조의 절대 중시나 영락6년조를 비롯한 남진 상황 홀대 등은 이제 극복 단계에 있으므로 고구려사를 바르게 구명하는 여러 면의 순리적 분석이 자연 흥성해지리라고 기대해 본다.
고구려는 중남 만주대륙을 휩쓴 나라지만 역사인구학으로 보아 사람은 한반도 안 쪽에 더 많이 살았던 것 같고 근자에 그 유적 유물이 남한에서 만도 무수히 확인되고 있다. 이번에 구리시는 아차산 보루 조사 발굴 등에 인연하여 전에 없던 호태왕 입상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금년(2002)에는 능비도 독립기념관에 세워진다 하거니와 이를 기념하는 학술회의가 거듭 열리는 마당에 우리는 북진 지향적 찬사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다. 당연히 문을 겸하여 기초를 다지고 한반도 중심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해준 점에 초점이 잡혀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원래 사실에 맞고 현재와 미래에도 유용하리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민족이 안정된 온대 중앙에 터전을 잡아 본격 농경정착을 할 때, 고구려가 그 최 후발세력으로서 유독 구복도 채우기 어려운 악조건을 극복해 나가면서 발전방향의 기본을 주로 남녘에 잡은 것은 특기할 만한 민족적 인연이었다. 이에 한반도의 주력국가가 되고 북녘 예맥계의 대표로서 남녘 삼한계의 대표격인 백제·신라와 자웅을 겨루게 되어 빛나는 삼국시대사가 전개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 점에서 고구려사를 과거 日帝가 滿鮮사관에 의해 봤다든지, 현재 중국이 그들의 변방사로 보려든 시각은 전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후 누가 한반도를 장악하느냐를 두고 제각금 최선의 노력이 경주된 결과, 우리 민족사의 전개는 매우 활력이 넘치는 것이 되었다. 고구려·백제가 특히 호적수가 되고 결국 신라가 머리를 써서 통일을 성취하기에 이르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고구려가 남진에 치중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조대왕에서 미천왕기에 이르는 남진성과는 그 숙제가 달성된 것이며, 고국원왕의 차질은 무모한 양면 대적의 파탄을 뜻하는 것이다. 다음 소수림왕대에 본격적인 문화국가적 대 정책전환이 감행되고 호태왕기의 적극적인 남진책이 현실적인 절실한 문제해결의 차원에서 선대의 설욕과 황해도 등 남녘 옥토를 차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중기의 남진발전은 결코 서진(서진)을 위한 전정이거나 그 대안이 아니라, 당시 고구려가 「민개토착」(민개토착)의 소중한 발전을 위하여 참으로 실리적으로 남진에 주력한 결과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민족은 절대다수가 결과적으로 농경시대이래 한반도에 중심터전을 잡아 그 개방성과 안정성을 적절히 조화 활용하면서 제대로 된 문화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선진 외래문화를 잘 소화 섭취하여 그때마다 한층 높은 수준의 전통문화로 키워온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였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이 대열에 참여하여 고도의 농업생산력을 추구하면서 벼농사에 맛깔스러운 조미 부식문화를 일구고 자연친화적이며 심미감 넘치는 주거문화, 그리고 자유롭고 멋 덩이인 옷맵시와 놀이문화를 즐기는 가운데 평화롭고 실속 있는 문화발전에 전심하였다. 그 결과 세계 최고급의 전통문화유산을 많이 남기고 뒤를 이어 특출한 인쇄 기록문화를 자랑하는 지식인 주도의 문화대국이 되도록 영향하였다. 또 역사상 고급 인력으로 짜인 문무 지도자는 많이 높은 경지의 문화활력을 발휘하여 이웃 중국도 놀래는 수준에 올라서고, 전근대 일본을 문명화하는 결정적 주체가 되기도 하였으니 이는 그 동안에도 옳은 설정이었고 장차에도 바르게 내다본 추진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유래한 우리민족문화의 차원은 변두리 아닌 중심적 세계적 보편성의 것이며 따라서 거란이나 몽골, 여진족과는 아주 다른 독자적이고 효과적인 발전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5세기 당시 동아시아 최강자로 보여지는 고구려족이 반도중심적인 정착과 문화발전을 꾀한 것은 당연한 설정이었으며, 이는 바로 민족사의 발전적 터전과 그 방향 내지 성격을 더욱 두드러지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도중심적 발전은 고구려사 자체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하여 5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 문화의 농경정착적 변화를 많이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우선 東夷傳의 기록의 변화(단적으로 戶數가 3세기경 3만이던 것이 5세기경 9만으로 뛰고 '民皆土着'했다고 나옴) 美術史 등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졸고,「東夷傳高句麗關係資料」p75 및 각「韓國美術史」참조.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호태왕기의 내치 외정이 함께 남진 위주로 치달은 의의가 고구려사에서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데 모아진다. 그리고 '광개토경 의 성격은 우리가 후대적인 상식과 억측으로 생각하는 외형적 넓이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전제왕권의 강화와 국제적인 지위 확인, 그리고 경제적으로 농경생산지대를 확보함으로써 민의 큰 호응 속에 다음 대에 걸쳐 고구려를 본격 농경문화민족으로 정착시키게 한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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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09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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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65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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