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메이지 시대의 영웅
2. 출생과 성장
3. 활동과정
4. 사후평가
5. 인물비교 - 유신삼걸(維新三傑)
2. 출생과 성장
3. 활동과정
4. 사후평가
5. 인물비교 - 유신삼걸(維新三傑)
본문내용
역적의 길을 선택해 시로야마(城山)에서 죽었다. 우찌무라에 의하면 "최대의 무사이자 최후의 무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사이고를 진정한 유신정신의 구현자로 보고 명치유신을 '미완성의 혁명'이라고 평가하였다.
현대의 통념으로는 사이고의 이상 또는 사이고라고 하는 심벌에 얽혀진 여러 가지 '유토피아'는 종종 봉건적, 반동, 침략주의 등의 마이너스 가치로 이야기되어지는 수가 많다. 일본 근대사에 있어 세이난 전쟁의 객관적 역할을 보면, 그것은 불만을 품은 사족의 반란이며 반동이었다. 그렇지만 사이고가 이룩한 객관적 역할과 사이고 자신의 '이상'이 반드시 동일하게 거론되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사이고 자신이 마이너스 평가가 부여된 중요한 이유는 사이고의 후계자로 지적된 현양사(玄洋社)사람들이 국가주의적 사상과 행동을 역으로 투사하여 거기에 사이고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부말 유신의 동란에서부터 세이난 전쟁에 이르는 내란을 그 와중 속에서 체험해 온 사람들로서는 사이고의 존재와 그 행동은 그토록 분명히 흑백을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사이고 비판- 사이고 역적론, 사이고의 대의명분 결여론, 사이고의 사족주의론, 사이고의 병력전제주의론, 사이고 범국헌론(犯國憲論)등을 비판하며 사이고 옹호론을 전개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사이고가 진정한 '대의명분'에 따라 행동한 점을 평가하고 그를 옹호했다. 사이고의 행동은 확고한 하나의 이념을 뒷받침 한 것이다. 후쿠자와는 거기서 참다운 '문명'의 지주가 되어야할 '저항의 정신'을 본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고는 정부에 대항함에 무력을 쓴 사람으로 나의 소견과는 조금 취향을 달리하는 바 있지만 결국 그 정신에 이르러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인물 비교- 유신삼걸(維新三傑)
·가츠라 고고로우 (기도 다카요시)
기도 다카요시의 본명은 가츠라 고고로우(桂小五郞), 호는 쇼오기쿠(松菊) 이다. 초슈번 출신으로 1849년 요시다 쇼오인(吉田松陰; 1830~1859, 쇼카손주쿠라는 사설학원을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씀. 1859년 안세이의 대옥에 연루되어서 처형됨)의 문하생이 되었고 에도에 나와서 검술을 배워 검객이 되었다. 1862년 영주에게 쇄국 정책과 도막 정책을 진언해 번 내의 정책을 존왕양이로 전환시켰고, 1865년 이름을 기도 다카요시로 바꿨다. 당시 사쓰마번과 초슈번은 막부에 대한 불만과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서양의 무력에 패배한 후 서구 문물에 대한 눈을 뜨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사쓰마번은 개국론, 초슈번은 양이론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대관계에 있었다. 이 두 번을 화해 시킨게 바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이다. 사카모토는 사쓰마번의 실세를 잡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초슈번의 실세 기도 다카요시를 설득해 동맹을 맺게 한다. 이게 바로 1866년 교토에서 비밀리에 맺어진 사쓰마-초슈 동맹(삿초동맹)이다. 기도는 메이지 유신 직후 정한론을 주장했지만 1871년 오쿠보와 함께 2년간 구미제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후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느끼고 내치 우선을 주장, 사이고 다카모리와 대립했다. 세이난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877년 병사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는 사쓰마의 가고시마에서 태어났다.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죽마고우였다. 막부 말기 친구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번주 시마즈에게 등용된 후 도막운동에 참가해 다이세이호칸과 왕정 복고 후 사쓰마번을 대표해서 활약했다. 1866년 초슈 번과의 연합, 삿초동맹을 통해 박부 토벌 세력을 확보했고 1867년 12월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유신 후 오쿠보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기도 다카요시(木戶高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등과 함께 정부 사절단으로서 근대적인 신제도를 시찰하고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을 하기 위해 구미 제국을 방문했다. 조약개정은 실패했지만 이 때 근대 선진 문물과 정치 제도등을 시찰한 것은 이후 일본의 근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873년 귀국 후 태정대신 산죠 사네토미(三條實美) 에게 영국을 모델로 한 의정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입헌정체 설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때쯤 정부는 정한론 논쟁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반관료파는 사민평등 후 쌓이게 된 사족들의 불만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침공할 것을 주장하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이와무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등은 정한을 궁국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보다는 우선 내정 충실에 힘써야 한다며 반대했다. 최종 결정은 천황에 의해 내려지게 되었고, 오쿠보의 공작으로 정한파는 패배하고 사이고는 고향인 가고시마로 낙향하고 그를 지지하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들도 모두 퇴진하게 된다. 사이고 퇴진 후 오쿠보는 참의 겸 내무경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차례차례 정부의 내부조직을 다지며 독재 정권을 다졌다.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사가의 반란(1874, 정한론에 패한 에토 신페이가 일으킨 난), 진푸렌의 난(1876, 폐도령에 격분해서 구마모토의 사족들이 일으킴) , 아키즈키의 난(1876, 미야자키 사노스케), 하기의 난(1876, 마에바라 잇세이),세이난 전쟁 (1877, 사이고 다카모리)으로 이어지는 불평 사족들의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고 부국강병책을 추진해 나갔다. 오쿠보는 내무성을 설립하고 경시청을 설립해 전국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경시청의 경찰들로는 주로 사쓰마 출신의 사족들을 발탁해서 정부의 앞잡이로 이용했다. 그의 정치는 오쿠보 독재로 불렸으며 이에 반대하는 자유민권운동이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1878년 5월, 출근 길에 도쿄에서 시마다 이치로(島田一郞)라는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참고문헌
·일본을 완성한 지도자들 (1998. 나무와 숲) 최영호
·3일만에 읽는 일본사 (2000. 서울문화사) 다케미쓰 마코토
·이야기 일본사 (1995. 청아출판사) 김희영
·일본의 역사 下 (1995. 대광서림) 이노우에 키요시
현대의 통념으로는 사이고의 이상 또는 사이고라고 하는 심벌에 얽혀진 여러 가지 '유토피아'는 종종 봉건적, 반동, 침략주의 등의 마이너스 가치로 이야기되어지는 수가 많다. 일본 근대사에 있어 세이난 전쟁의 객관적 역할을 보면, 그것은 불만을 품은 사족의 반란이며 반동이었다. 그렇지만 사이고가 이룩한 객관적 역할과 사이고 자신의 '이상'이 반드시 동일하게 거론되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사이고 자신이 마이너스 평가가 부여된 중요한 이유는 사이고의 후계자로 지적된 현양사(玄洋社)사람들이 국가주의적 사상과 행동을 역으로 투사하여 거기에 사이고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부말 유신의 동란에서부터 세이난 전쟁에 이르는 내란을 그 와중 속에서 체험해 온 사람들로서는 사이고의 존재와 그 행동은 그토록 분명히 흑백을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사이고 비판- 사이고 역적론, 사이고의 대의명분 결여론, 사이고의 사족주의론, 사이고의 병력전제주의론, 사이고 범국헌론(犯國憲論)등을 비판하며 사이고 옹호론을 전개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사이고가 진정한 '대의명분'에 따라 행동한 점을 평가하고 그를 옹호했다. 사이고의 행동은 확고한 하나의 이념을 뒷받침 한 것이다. 후쿠자와는 거기서 참다운 '문명'의 지주가 되어야할 '저항의 정신'을 본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고는 정부에 대항함에 무력을 쓴 사람으로 나의 소견과는 조금 취향을 달리하는 바 있지만 결국 그 정신에 이르러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인물 비교- 유신삼걸(維新三傑)
·가츠라 고고로우 (기도 다카요시)
기도 다카요시의 본명은 가츠라 고고로우(桂小五郞), 호는 쇼오기쿠(松菊) 이다. 초슈번 출신으로 1849년 요시다 쇼오인(吉田松陰; 1830~1859, 쇼카손주쿠라는 사설학원을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씀. 1859년 안세이의 대옥에 연루되어서 처형됨)의 문하생이 되었고 에도에 나와서 검술을 배워 검객이 되었다. 1862년 영주에게 쇄국 정책과 도막 정책을 진언해 번 내의 정책을 존왕양이로 전환시켰고, 1865년 이름을 기도 다카요시로 바꿨다. 당시 사쓰마번과 초슈번은 막부에 대한 불만과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서양의 무력에 패배한 후 서구 문물에 대한 눈을 뜨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사쓰마번은 개국론, 초슈번은 양이론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대관계에 있었다. 이 두 번을 화해 시킨게 바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이다. 사카모토는 사쓰마번의 실세를 잡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초슈번의 실세 기도 다카요시를 설득해 동맹을 맺게 한다. 이게 바로 1866년 교토에서 비밀리에 맺어진 사쓰마-초슈 동맹(삿초동맹)이다. 기도는 메이지 유신 직후 정한론을 주장했지만 1871년 오쿠보와 함께 2년간 구미제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후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느끼고 내치 우선을 주장, 사이고 다카모리와 대립했다. 세이난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877년 병사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는 사쓰마의 가고시마에서 태어났다.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죽마고우였다. 막부 말기 친구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번주 시마즈에게 등용된 후 도막운동에 참가해 다이세이호칸과 왕정 복고 후 사쓰마번을 대표해서 활약했다. 1866년 초슈 번과의 연합, 삿초동맹을 통해 박부 토벌 세력을 확보했고 1867년 12월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유신 후 오쿠보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기도 다카요시(木戶高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등과 함께 정부 사절단으로서 근대적인 신제도를 시찰하고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을 하기 위해 구미 제국을 방문했다. 조약개정은 실패했지만 이 때 근대 선진 문물과 정치 제도등을 시찰한 것은 이후 일본의 근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873년 귀국 후 태정대신 산죠 사네토미(三條實美) 에게 영국을 모델로 한 의정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입헌정체 설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때쯤 정부는 정한론 논쟁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반관료파는 사민평등 후 쌓이게 된 사족들의 불만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침공할 것을 주장하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이와무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등은 정한을 궁국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보다는 우선 내정 충실에 힘써야 한다며 반대했다. 최종 결정은 천황에 의해 내려지게 되었고, 오쿠보의 공작으로 정한파는 패배하고 사이고는 고향인 가고시마로 낙향하고 그를 지지하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들도 모두 퇴진하게 된다. 사이고 퇴진 후 오쿠보는 참의 겸 내무경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차례차례 정부의 내부조직을 다지며 독재 정권을 다졌다.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사가의 반란(1874, 정한론에 패한 에토 신페이가 일으킨 난), 진푸렌의 난(1876, 폐도령에 격분해서 구마모토의 사족들이 일으킴) , 아키즈키의 난(1876, 미야자키 사노스케), 하기의 난(1876, 마에바라 잇세이),세이난 전쟁 (1877, 사이고 다카모리)으로 이어지는 불평 사족들의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고 부국강병책을 추진해 나갔다. 오쿠보는 내무성을 설립하고 경시청을 설립해 전국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경시청의 경찰들로는 주로 사쓰마 출신의 사족들을 발탁해서 정부의 앞잡이로 이용했다. 그의 정치는 오쿠보 독재로 불렸으며 이에 반대하는 자유민권운동이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1878년 5월, 출근 길에 도쿄에서 시마다 이치로(島田一郞)라는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참고문헌
·일본을 완성한 지도자들 (1998. 나무와 숲) 최영호
·3일만에 읽는 일본사 (2000. 서울문화사) 다케미쓰 마코토
·이야기 일본사 (1995. 청아출판사) 김희영
·일본의 역사 下 (1995. 대광서림) 이노우에 키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