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
1. 연개소문의 출신
2. 규염객 전
3. 갓쉰동 전
4. 사족
연개소문의 집권과정
1. 경극(京劇)의 주인공 연개소문
2. 연개소문의 집안
3.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까닭
연개소문의 업적
4. 영류왕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
5. 연개소문의 활약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멸망
6. 남생, 남산, 남건 3형제의 불화
7. 남생 3형제와 산상왕 3형제 비교
1. 연개소문의 출신
2. 규염객 전
3. 갓쉰동 전
4. 사족
연개소문의 집권과정
1. 경극(京劇)의 주인공 연개소문
2. 연개소문의 집안
3.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까닭
연개소문의 업적
4. 영류왕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
5. 연개소문의 활약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멸망
6. 남생, 남산, 남건 3형제의 불화
7. 남생 3형제와 산상왕 3형제 비교
본문내용
써 측천무후의 전횡을 초래했던 사람이다)
3) 사수대첩
649년 당의 군주가 된 치는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다. 한편 고구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영류왕의 실정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침략군과 싸운 데다가 이 싸움이 전과 다르게 고구려군 단독으로 당의 연합세력과 진행된 관계로 많은 기력을 소진했다. 게다가 당태종을 사로잡지 못해 당의 세력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불안한 평화를 유지해야 했다.
한편 신라는 이세민의 유언내용을 듣고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김춘추와 아들 법민을 당에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 원정군을 내 줄 것을 간청했다. 백제는 이틈을 타 신라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줄기차게 공격을 단행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은 전술을 바꾸었다. 대규모 원정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주변 민족들을 이용하여 소규모로 자주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고구려의 힘을 조금씩 약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고구려는 입술이 없는 이빨과 같은 처지가 돼가고 있었다.
654년 김춘추는 신라왕이 되었고, 655년 당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측천무후에게 사신을 보내 백제원정군을 요청했다. 측천무후는 소정방, 유인궤, 설인귀 등에게 13만의 병력을 주어 백제를 공략토록 하였고 신라와 연합하여 660년 의자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당은 요동방면에도 중규모 부대를 보내 고구려 국경을 공격함으로써 고구려는 구원군을 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이때 연개소문은 병으로 누워있었다는 설들도 있음)
660년 겨울, 백제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소정방은 패수를 거슬러 올라가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포위했다. 660년 12월부터 큰 눈이 내려 소정방 군은 군량미 조달에 애를 먹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좌효위대장군 방효태에게 10만의 병력을 주어 육로로 평양성을 향해 출발토록 하였고 신라에는 10만 대군의 군량미를 조달할 것을 요구해 신라의 김유신은 67살의 노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군량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이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병석에 누워있던 연개소문은 작전의 핵심을 방효태 군에게 맞췄다. 방효태 군을 격파하면 소정방 군은 고립무원이 되고 군량을 수송하는 신라군은 전투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찰병을 통해 방효태가 평양 동쪽을 공격하기 위해 패수의 상류 쪽으로 접근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그는 3만의 별동대를 구성하여 병중에도 직접 눈보라를 뚫고 패수의 상류인 사수로 이동했다. 사수는 강폭이 좁은데다가 겨울이라 얼어있었다. 연개소문은 발석거를 대거 동원하여 사수 양쪽으로 부대를 나누어 매복했다. 사수에 도착한 방효태 군은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통상 종대로 도하하는 병법을 어기고 횡대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방효태 군의 대부분이 강 한가운데 이르자 연개소문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고구려 군은 양쪽에서 발석거로 큰 돌을 강을 향해 쏘아댔다. 바위가 떨어지자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갈라지고 방효태 군은 강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요행히 강변으로 달아난 당군은 매복하던 고구려 군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한나절 뒤 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그리고 10만 대군 모두 전멸당하는 참담한 패전을 당하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사수대첩이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연개소문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연개소문의 사망연도에 대해 657년, 661년, 665년 설이 있다)
방효태가 전사한 후 평양성에 도착한 신라군으로부터 소정방은 군량을 조달받아 황급히 퇴각했고 신라군은 아무 소득없이 돌아가야 했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멸망
6. 남생, 남산, 남건 3형제의 불화
연개소문이 죽은 후 왕은 연개소문을 따라 군공을 많이 세운 맏아들 남생을 막리지로 삼았다. 3형제는 매우 사이가 좋았고 서로 협력하여 고구려를 잘 지켰다. 665년, 남생이 요동방면의 현황을 시찰하러 나간 사이 연개소문에게 숙청되어 앙심을 품고 있던 대신들의 족당들이 남산과 남건을 꼬드겼다.
남산은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된 뒤, 보장왕을 시켜 남생을 소환토록 했다. 남생은 소환에 응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헌성은 당나라로 망명할 것을 주장했다. 남생은 말갈과 거란부족을 이끌고 당에 투항하였다. 당은 667년 그를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3형제를 이간시킨 신성이란 중을 이용하여 평양성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남산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결국 신성의 협력을 받은 당군에게 포위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쳐 포로로 사로잡혔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7. 남생 3형제와 산상왕 3형제 비교
남생 3형제와 비슷한 경우가 고구려 10대 산상왕때에 있었다. 산상왕은 둘째였는데 형 몰래 왕명을 받아 10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를 뒤늦게 안 형 발기가 노하여 왕성을 공격하였다. 힘이 모자라자 그는 요서의 공손씨에게 몸을 의탁했고 공손씨는 3만 병력을 그에게 주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산상왕은 막내인 계수를 불렀다. 계수에게 지휘권을 맡겨 마침내 요하에서 계수와 발기가 맞붙었다. 전투개시 전에 발기는 계수를 불러내 말했다.
"나는 장자로서 당연히 왕위계승권이 있는데 밤에 둘째인 연우가 왕위를 가로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의롭지 못한 연우를 도우려 하는가?"
계수가 말 위에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작은 형이 왕위를 가로챈 것은 부당하며 나 또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민족에게 빌붙어 자기 나라를 공격하는 큰 형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사욕을 위해 제 나라를 치는 놈을 어찌 가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발기는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고 계수는 공손씨를 토벌한 뒤 발기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과 같은 예우로 장례를 치뤘다. 산상왕은 신하들이 계수의 행위를 성토하였으나 산상왕은 계수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일소에 붙였다.
남생은 아들의 말을 따르긴 했으나 개인의 안위를 위해 자기 조국을 멸망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는 점이 고구려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참고자료
<<두산대백과사전>>
인터넷"http://www.history21.org"
3) 사수대첩
649년 당의 군주가 된 치는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다. 한편 고구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영류왕의 실정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침략군과 싸운 데다가 이 싸움이 전과 다르게 고구려군 단독으로 당의 연합세력과 진행된 관계로 많은 기력을 소진했다. 게다가 당태종을 사로잡지 못해 당의 세력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불안한 평화를 유지해야 했다.
한편 신라는 이세민의 유언내용을 듣고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김춘추와 아들 법민을 당에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 원정군을 내 줄 것을 간청했다. 백제는 이틈을 타 신라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줄기차게 공격을 단행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은 전술을 바꾸었다. 대규모 원정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주변 민족들을 이용하여 소규모로 자주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고구려의 힘을 조금씩 약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고구려는 입술이 없는 이빨과 같은 처지가 돼가고 있었다.
654년 김춘추는 신라왕이 되었고, 655년 당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측천무후에게 사신을 보내 백제원정군을 요청했다. 측천무후는 소정방, 유인궤, 설인귀 등에게 13만의 병력을 주어 백제를 공략토록 하였고 신라와 연합하여 660년 의자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당은 요동방면에도 중규모 부대를 보내 고구려 국경을 공격함으로써 고구려는 구원군을 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이때 연개소문은 병으로 누워있었다는 설들도 있음)
660년 겨울, 백제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소정방은 패수를 거슬러 올라가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포위했다. 660년 12월부터 큰 눈이 내려 소정방 군은 군량미 조달에 애를 먹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좌효위대장군 방효태에게 10만의 병력을 주어 육로로 평양성을 향해 출발토록 하였고 신라에는 10만 대군의 군량미를 조달할 것을 요구해 신라의 김유신은 67살의 노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군량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이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병석에 누워있던 연개소문은 작전의 핵심을 방효태 군에게 맞췄다. 방효태 군을 격파하면 소정방 군은 고립무원이 되고 군량을 수송하는 신라군은 전투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찰병을 통해 방효태가 평양 동쪽을 공격하기 위해 패수의 상류 쪽으로 접근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그는 3만의 별동대를 구성하여 병중에도 직접 눈보라를 뚫고 패수의 상류인 사수로 이동했다. 사수는 강폭이 좁은데다가 겨울이라 얼어있었다. 연개소문은 발석거를 대거 동원하여 사수 양쪽으로 부대를 나누어 매복했다. 사수에 도착한 방효태 군은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통상 종대로 도하하는 병법을 어기고 횡대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방효태 군의 대부분이 강 한가운데 이르자 연개소문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고구려 군은 양쪽에서 발석거로 큰 돌을 강을 향해 쏘아댔다. 바위가 떨어지자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갈라지고 방효태 군은 강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요행히 강변으로 달아난 당군은 매복하던 고구려 군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한나절 뒤 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그리고 10만 대군 모두 전멸당하는 참담한 패전을 당하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사수대첩이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연개소문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연개소문의 사망연도에 대해 657년, 661년, 665년 설이 있다)
방효태가 전사한 후 평양성에 도착한 신라군으로부터 소정방은 군량을 조달받아 황급히 퇴각했고 신라군은 아무 소득없이 돌아가야 했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멸망
6. 남생, 남산, 남건 3형제의 불화
연개소문이 죽은 후 왕은 연개소문을 따라 군공을 많이 세운 맏아들 남생을 막리지로 삼았다. 3형제는 매우 사이가 좋았고 서로 협력하여 고구려를 잘 지켰다. 665년, 남생이 요동방면의 현황을 시찰하러 나간 사이 연개소문에게 숙청되어 앙심을 품고 있던 대신들의 족당들이 남산과 남건을 꼬드겼다.
남산은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된 뒤, 보장왕을 시켜 남생을 소환토록 했다. 남생은 소환에 응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헌성은 당나라로 망명할 것을 주장했다. 남생은 말갈과 거란부족을 이끌고 당에 투항하였다. 당은 667년 그를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3형제를 이간시킨 신성이란 중을 이용하여 평양성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남산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결국 신성의 협력을 받은 당군에게 포위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쳐 포로로 사로잡혔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7. 남생 3형제와 산상왕 3형제 비교
남생 3형제와 비슷한 경우가 고구려 10대 산상왕때에 있었다. 산상왕은 둘째였는데 형 몰래 왕명을 받아 10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를 뒤늦게 안 형 발기가 노하여 왕성을 공격하였다. 힘이 모자라자 그는 요서의 공손씨에게 몸을 의탁했고 공손씨는 3만 병력을 그에게 주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산상왕은 막내인 계수를 불렀다. 계수에게 지휘권을 맡겨 마침내 요하에서 계수와 발기가 맞붙었다. 전투개시 전에 발기는 계수를 불러내 말했다.
"나는 장자로서 당연히 왕위계승권이 있는데 밤에 둘째인 연우가 왕위를 가로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의롭지 못한 연우를 도우려 하는가?"
계수가 말 위에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작은 형이 왕위를 가로챈 것은 부당하며 나 또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민족에게 빌붙어 자기 나라를 공격하는 큰 형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사욕을 위해 제 나라를 치는 놈을 어찌 가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발기는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고 계수는 공손씨를 토벌한 뒤 발기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과 같은 예우로 장례를 치뤘다. 산상왕은 신하들이 계수의 행위를 성토하였으나 산상왕은 계수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일소에 붙였다.
남생은 아들의 말을 따르긴 했으나 개인의 안위를 위해 자기 조국을 멸망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는 점이 고구려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참고자료
<<두산대백과사전>>
인터넷"http://www.history21.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