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고려왕조 멸망의 배경
⑴ 이인임 정권의 한계와 무장세력의 대두
⑵ 이인임 정권 내부의 갈등과 최영의 집권
⑶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2) 이성계의 집권과 고려왕조의 멸망
(1) 이성계 집성체제 강화를 위한 개혁
(2) 공양왕 옹립과 이성계의 실권 장악
(3) 정몽주 살해와 이성계의 왕위찬탈
⑴ 이인임 정권의 한계와 무장세력의 대두
⑵ 이인임 정권 내부의 갈등과 최영의 집권
⑶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2) 이성계의 집권과 고려왕조의 멸망
(1) 이성계 집성체제 강화를 위한 개혁
(2) 공양왕 옹립과 이성계의 실권 장악
(3) 정몽주 살해와 이성계의 왕위찬탈
본문내용
이 서경에 와서 군사를 거느리고 이성계 등 9공신을 살해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이다. 이 '김종연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가운데 공양왕 추대의 공신이기도 한 심덕부·지용기·박위 등이 있었는데 이는 이성계세력 내부에 분열과 대립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반발에 대하여 이성계 세력을 하급병사까지 철저히 숙청하는 등 매우 강경한 조치를 취하고, 아울러 무장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집단을 흡수하였고 이성계가 서울과 지방의 군사를 모두 통솔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달 뒤에는 우창당·이초당에 빠져 있던 지용기마저 역모죄로 몰아 장류(杖流)하였으니 이로써 9공신 가운데 이성계와 견줄 만한 능력을 가진 무장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3) 정몽주 살해와 이성계의 왕위찬탈
이상 살핀 바와 같이 우와 14년 위화도회군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마침내 군국(軍國)의 대권(大權)을 장악하였으며 공양왕을 옹립한 뒤로부터 국왕의 존재가 완전히 괴뢰에 불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계의 전횡은 그의 정책을 지지해 온 정몽주마저 이성계 세력에서 이탈하게 하였다. '이초당'을 다시 심하게 논핵하는 과정에서 정몽주가 이색·권근 등을 사면하는 은혜를 내리기를 건의하였고, 정몽주와 이성계 세력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초당 사건의 형량을 낮추거나 사면하려는 뜻에 정몽주와 공양왕이 같이하자 정몽주의 태도를 둘러싸고 정몽주를 옹호하는 세력과 그 반대세력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로써 이초당 처벌문제로 인하여 대간직 내부에는 비록 열세이기는 하였지만 이초당을 옹호하는 정몽주당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사건은 정몽주와 공양왕의 결속을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몽주 동조세력들은 활발한 대간활동을 통해 이성계 세력을 견제해 가고 있었다. 또한 정몽주와 같은 정치노선을 가진 인물뿐 아니라 이색·조호·우현보 등과 같이 우왕·창왕대의 정치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세력들도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정몽주와 연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심지어 왕의 재가만 얻는다면 이성계의 우익을 모두 제가하고 이성계까지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공양왕 4년의 정국은 정몽주 동조세력들이 언론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양왕는 이성계의 독주에 지쳐 있었지만 정몽주 세력의 요구에 놀라 이성계세 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였다. 이러한 소강의 기회를 포착한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사세의 위급함을 알려 정몽주 제거라는 비상수단을 동원, 실천에 옮겼다. 이와 같이 이성계는 최후로 남아 있던 고려왕조 유지론자인 정몽주를 제거하였으며 그 세력을 먼 곳으로 귀양보내었다. 이에 고립무원에 빠진 공양왕은 4년(1392) 월 이성계에 의지하여 고려왕조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성계파 우시중 배극렴이 폐위상소를 올리니, 결국 왕대비의 명으로 공양왕은 폐위되어 원주로 방출되었다. 이로써 고려왕조의 국새(國璽)는 마침내 이성계에게 넘겨서, 1392년 7월 17일 권지고려군국사(權知高麗軍國事)로서 즉위하니 34대 475년에 걸친 고려왕조는 무대 뒤로 사라지고 말았다.
(3) 정몽주 살해와 이성계의 왕위찬탈
이상 살핀 바와 같이 우와 14년 위화도회군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마침내 군국(軍國)의 대권(大權)을 장악하였으며 공양왕을 옹립한 뒤로부터 국왕의 존재가 완전히 괴뢰에 불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계의 전횡은 그의 정책을 지지해 온 정몽주마저 이성계 세력에서 이탈하게 하였다. '이초당'을 다시 심하게 논핵하는 과정에서 정몽주가 이색·권근 등을 사면하는 은혜를 내리기를 건의하였고, 정몽주와 이성계 세력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초당 사건의 형량을 낮추거나 사면하려는 뜻에 정몽주와 공양왕이 같이하자 정몽주의 태도를 둘러싸고 정몽주를 옹호하는 세력과 그 반대세력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로써 이초당 처벌문제로 인하여 대간직 내부에는 비록 열세이기는 하였지만 이초당을 옹호하는 정몽주당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사건은 정몽주와 공양왕의 결속을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몽주 동조세력들은 활발한 대간활동을 통해 이성계 세력을 견제해 가고 있었다. 또한 정몽주와 같은 정치노선을 가진 인물뿐 아니라 이색·조호·우현보 등과 같이 우왕·창왕대의 정치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세력들도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정몽주와 연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심지어 왕의 재가만 얻는다면 이성계의 우익을 모두 제가하고 이성계까지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공양왕 4년의 정국은 정몽주 동조세력들이 언론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양왕는 이성계의 독주에 지쳐 있었지만 정몽주 세력의 요구에 놀라 이성계세 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였다. 이러한 소강의 기회를 포착한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사세의 위급함을 알려 정몽주 제거라는 비상수단을 동원, 실천에 옮겼다. 이와 같이 이성계는 최후로 남아 있던 고려왕조 유지론자인 정몽주를 제거하였으며 그 세력을 먼 곳으로 귀양보내었다. 이에 고립무원에 빠진 공양왕은 4년(1392) 월 이성계에 의지하여 고려왕조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성계파 우시중 배극렴이 폐위상소를 올리니, 결국 왕대비의 명으로 공양왕은 폐위되어 원주로 방출되었다. 이로써 고려왕조의 국새(國璽)는 마침내 이성계에게 넘겨서, 1392년 7월 17일 권지고려군국사(權知高麗軍國事)로서 즉위하니 34대 475년에 걸친 고려왕조는 무대 뒤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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