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신라 불교의 수용 - 순조롭지 않은 불교의 수용
2. 불교 수용전의 신라의 모습
3. 신라 불교 수용측면에서의 요약
4. 황룡사에 대해.
1) 황룡사 창건에 대하여
2) 창건 이후의 조영(造營) ; 장육상
3) 창건 이후의 조영(造營) : 9층목탑
4) 황룡사에서 이루어진 행사 : 백좌강회(百座講會)
5) 황룡사 寺主(사주)의 性格(성격)
5. 통일신라의 불교
6. 신라불교의 타락과 선종의 수용
7.신라의 고승들
- 왕권을 뒷받침하는 불교를 발전시킨 승려 -
- 민중속에서 불교를 전파시킨 승려 -
2. 불교 수용전의 신라의 모습
3. 신라 불교 수용측면에서의 요약
4. 황룡사에 대해.
1) 황룡사 창건에 대하여
2) 창건 이후의 조영(造營) ; 장육상
3) 창건 이후의 조영(造營) : 9층목탑
4) 황룡사에서 이루어진 행사 : 백좌강회(百座講會)
5) 황룡사 寺主(사주)의 性格(성격)
5. 통일신라의 불교
6. 신라불교의 타락과 선종의 수용
7.신라의 고승들
- 왕권을 뒷받침하는 불교를 발전시킨 승려 -
- 민중속에서 불교를 전파시킨 승려 -
본문내용
죽임으로써 자기만 기를 분이니 이것이 어찌 인인군자(仁人君子)가 할 일이겠습니까? 저희들의 무리는 아닙니다."
마침내 옷을 떨치고 가버렸다. 공은 크게 부끄러워 그가 먹은 것을 보니, 쟁반 안에 고기 살점이 그대로 있었다. 공은 매우 이상히 여겨 돌아와서 조정에 아뢰었다.
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맞아오게 했더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서 자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사자는 추하게 여겨 돌아오다가 7, 8리쯤 가서 혜숙을 도중에서 만났다. 사자는 그가 어디서 오는가를 물었다.
"성안 시주댁의 7일재에 갔다가 끝마치고 오오."
사자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었다. 또 사람을 보내어 그 시주 집을 조사해보니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얼마 후 혜숙이 갑자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혹은 형현( 峴)이라 고도 쓴다-동쪽에 장사지냈다 그때 고개 서쪽에서 오던 마을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혜숙 을 도중에서 만나 그가 어디 가는가를 물었다.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으므로 다른 지방으로 유람할까 하네."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다. 혜 숙은 반 리쯤 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그 사람은 고개 동쪽에 이르러 혜숙을 장사지낸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음을 보고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으므로 무덤을 파보니 다만 짚신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의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라는 절이 있는데, 곧 그가 살던 곳이라 하며 또한 부도(浮圖)도 있 다.
혜공의 갖가지 영적
중 혜공(惠公)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 고용살이하던 노파의 아들인데 아이 때 이름 은 우조(優助)-아마 우리말일 것이다-였다. 공이 일찍이 몹쓸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자 문병오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이때 우조는 나이 일곱 살이었는데,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 다.
"집에 무슨 일이 있기에 손님이 이렇게 많습니까?"
"주인께서 악병(惡病)이 나서 장차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너느 어찌 그것도 모르고 있었 느냐?"
"제가 병을 고쳐보겠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이상히 여겨 공에게 알렸다. 공이 그를 불러 오게 하니, 와서 평상 밑에 앉아서 한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래지 않아 몹쓸 종기가 터져버렸다. 공은 이것이 우연한 일이라 하고 그다지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더 자라서는 공을 위해 매를 길렀는데 공의 마음에 썩 들었다. 처음에 공의 아루로서 벼 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의 아우로서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골라놓은 좋은 매를 얻어서 치소(治所)로 갔다. 어느 날 저녁 공은 문 득 그 매를 생각하고는 이튿날 새벽 우조를 보내어 매를 가져오게 하려 했다. 우조가 이것 을 먼저 알아채고 잠깐 사이에 매를 가져와서 새벽에 공에게 드렸다. 공은 크게 놀라 깨 달아 그제야 예전에 몹쓸 종기를 치료한 일이 모두 측량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공은 우조에게 말했다.
"나는 지덕이 뛰어난 성인이 우리 집에 의탁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몹쓸 말과 비례 (非禮)로써 모욕했으니 그 죄를 어찌 씻겠습니까?" 이후로는 도사(導師)가 되어 나를 인도 해주시오."
아침내 내려가서 절을 했다. 우조는 신령스럽고 이상함이 이미 나타났으므로 마침내 출가 하여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혜공으로 바꾸었다.
그는 어느 작은 절에 살면서 언제나 미친 것처럼 크게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춘 까닭에, 그를 부궤화상(負 和尙)이라 불렀으며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 했다. 부개는 곧 궤의 우리말이다.
언제나 절의 우물 속에 들어가면 몇 달씩이나 나오지 않으므로, 스님의 이름으로 그 우물 이름을 지었다. 우물에서 나올 때마다 푸른 옷 입은 신동이 먼저 솟아나왔으므로 절의 중이 이로써 나오는 시각을 알게 되었으며, 나오더라도 옷은 젖어 있지 않았다.
혜공과 원효대사의 교제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다. 민간에서는 항 하사(恒河沙)처음 많은 사람이 출세했으므로 항사동(恒沙洞)이라 한다-에 가서 있었다.
이때 원효(元曉)는 여러 불경의 주소(住疎)를 찬술(撰術)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하거나 서로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혜공과 원효과 시내를 따라가며 물 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대변을 보고 있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장난 쳤 다.
"당신이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거요."
그로 인하여 오어사(경상북도 영일군에 있는 절. 신라 때 혜공이 있었다고 한다)라 했다. 어떤 이는 이를 원효대사의 말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민 간에서는 그 시내를 그릇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구감공은 언젠가 산에 올랐다가 혜공이 산길에 죽어 쓰러져 있는데, 그 시체의 살이 부어 터지고 썩어 구더기가 난 것을 보고 한참 동안 슬퍼했다. 고삐를 돌려 성안에 들어가자, 혜 공이 크게 취해서 시중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 날 풀로 새끼를 꼬아서는 영묘사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의 경루(經漏)와 남문의 낭무(廊 )에 둘러 묶고 강사(剛司)에게 알렸다.
"이 새끼줄을 사흘 후에 풀어라."
강사는 이상히 여겨 그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사흘 만에 신덕여왕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 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나와 그 탑을 태웠으나 다만 새끼 맨 곳만은 화재를 면했 다.
또 신인종(神印宗의 조사 명랑(明朗)이 금강사(金剛寺)를 새로 세우고 낙성회를 베풀 었을 때에, 고승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혜공 스님만은 오지 않았다.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 성껏 기도했더니 조금 뒤에 공이 왔다. 이때 바야흐로 큰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공의 옷은 젖지 않았고, 발에는 진흙이 묻지 않았다.
혜공은 명랑에게 말했다.
"초청이 은근해서 왔소."
이처럼 신령스런 자취가 매우 많았으며,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세상을 마쳤는데, 그의 사 리는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언젠가 [조론(肇論)]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내가 옛적에 지은 것이다."
이로써 혜공이 승조(僧肇)의 후신임을 알겠다.
기린다.
벌판에서 사냥하고 평상에 누웠었고
술집에서 노래하고 우물 속에서 잠을 잤다
혜숙과 혜공이 어디로 떠났는고
한 쌍의 귀중한 불속의 연꽃이리
마침내 옷을 떨치고 가버렸다. 공은 크게 부끄러워 그가 먹은 것을 보니, 쟁반 안에 고기 살점이 그대로 있었다. 공은 매우 이상히 여겨 돌아와서 조정에 아뢰었다.
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맞아오게 했더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서 자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사자는 추하게 여겨 돌아오다가 7, 8리쯤 가서 혜숙을 도중에서 만났다. 사자는 그가 어디서 오는가를 물었다.
"성안 시주댁의 7일재에 갔다가 끝마치고 오오."
사자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었다. 또 사람을 보내어 그 시주 집을 조사해보니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얼마 후 혜숙이 갑자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혹은 형현( 峴)이라 고도 쓴다-동쪽에 장사지냈다 그때 고개 서쪽에서 오던 마을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혜숙 을 도중에서 만나 그가 어디 가는가를 물었다.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으므로 다른 지방으로 유람할까 하네."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다. 혜 숙은 반 리쯤 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그 사람은 고개 동쪽에 이르러 혜숙을 장사지낸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음을 보고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으므로 무덤을 파보니 다만 짚신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의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라는 절이 있는데, 곧 그가 살던 곳이라 하며 또한 부도(浮圖)도 있 다.
혜공의 갖가지 영적
중 혜공(惠公)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 고용살이하던 노파의 아들인데 아이 때 이름 은 우조(優助)-아마 우리말일 것이다-였다. 공이 일찍이 몹쓸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자 문병오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이때 우조는 나이 일곱 살이었는데,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 다.
"집에 무슨 일이 있기에 손님이 이렇게 많습니까?"
"주인께서 악병(惡病)이 나서 장차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너느 어찌 그것도 모르고 있었 느냐?"
"제가 병을 고쳐보겠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이상히 여겨 공에게 알렸다. 공이 그를 불러 오게 하니, 와서 평상 밑에 앉아서 한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래지 않아 몹쓸 종기가 터져버렸다. 공은 이것이 우연한 일이라 하고 그다지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더 자라서는 공을 위해 매를 길렀는데 공의 마음에 썩 들었다. 처음에 공의 아루로서 벼 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의 아우로서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골라놓은 좋은 매를 얻어서 치소(治所)로 갔다. 어느 날 저녁 공은 문 득 그 매를 생각하고는 이튿날 새벽 우조를 보내어 매를 가져오게 하려 했다. 우조가 이것 을 먼저 알아채고 잠깐 사이에 매를 가져와서 새벽에 공에게 드렸다. 공은 크게 놀라 깨 달아 그제야 예전에 몹쓸 종기를 치료한 일이 모두 측량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공은 우조에게 말했다.
"나는 지덕이 뛰어난 성인이 우리 집에 의탁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몹쓸 말과 비례 (非禮)로써 모욕했으니 그 죄를 어찌 씻겠습니까?" 이후로는 도사(導師)가 되어 나를 인도 해주시오."
아침내 내려가서 절을 했다. 우조는 신령스럽고 이상함이 이미 나타났으므로 마침내 출가 하여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혜공으로 바꾸었다.
그는 어느 작은 절에 살면서 언제나 미친 것처럼 크게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춘 까닭에, 그를 부궤화상(負 和尙)이라 불렀으며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 했다. 부개는 곧 궤의 우리말이다.
언제나 절의 우물 속에 들어가면 몇 달씩이나 나오지 않으므로, 스님의 이름으로 그 우물 이름을 지었다. 우물에서 나올 때마다 푸른 옷 입은 신동이 먼저 솟아나왔으므로 절의 중이 이로써 나오는 시각을 알게 되었으며, 나오더라도 옷은 젖어 있지 않았다.
혜공과 원효대사의 교제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다. 민간에서는 항 하사(恒河沙)처음 많은 사람이 출세했으므로 항사동(恒沙洞)이라 한다-에 가서 있었다.
이때 원효(元曉)는 여러 불경의 주소(住疎)를 찬술(撰術)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하거나 서로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혜공과 원효과 시내를 따라가며 물 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대변을 보고 있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장난 쳤 다.
"당신이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거요."
그로 인하여 오어사(경상북도 영일군에 있는 절. 신라 때 혜공이 있었다고 한다)라 했다. 어떤 이는 이를 원효대사의 말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민 간에서는 그 시내를 그릇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구감공은 언젠가 산에 올랐다가 혜공이 산길에 죽어 쓰러져 있는데, 그 시체의 살이 부어 터지고 썩어 구더기가 난 것을 보고 한참 동안 슬퍼했다. 고삐를 돌려 성안에 들어가자, 혜 공이 크게 취해서 시중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 날 풀로 새끼를 꼬아서는 영묘사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의 경루(經漏)와 남문의 낭무(廊 )에 둘러 묶고 강사(剛司)에게 알렸다.
"이 새끼줄을 사흘 후에 풀어라."
강사는 이상히 여겨 그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사흘 만에 신덕여왕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 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나와 그 탑을 태웠으나 다만 새끼 맨 곳만은 화재를 면했 다.
또 신인종(神印宗의 조사 명랑(明朗)이 금강사(金剛寺)를 새로 세우고 낙성회를 베풀 었을 때에, 고승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혜공 스님만은 오지 않았다.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 성껏 기도했더니 조금 뒤에 공이 왔다. 이때 바야흐로 큰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공의 옷은 젖지 않았고, 발에는 진흙이 묻지 않았다.
혜공은 명랑에게 말했다.
"초청이 은근해서 왔소."
이처럼 신령스런 자취가 매우 많았으며,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세상을 마쳤는데, 그의 사 리는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언젠가 [조론(肇論)]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내가 옛적에 지은 것이다."
이로써 혜공이 승조(僧肇)의 후신임을 알겠다.
기린다.
벌판에서 사냥하고 평상에 누웠었고
술집에서 노래하고 우물 속에서 잠을 잤다
혜숙과 혜공이 어디로 떠났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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