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지도자 전봉준
본 자료는 1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해당 자료는 1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봉건적 토지제도는 생산력 발전을 주안점으로 경작능력에 따른 경작 균분제도에 의하여 크게 개혁되었으며, 반일·반침략의 자세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집강소 개혁정치는 지방자치의 차원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의 권력문제에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제2차 농민전쟁
조선의 보호국화를 추진했던 일본은 8월 17일의 평양성전투에서 청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개화파정권의 요청을 받아들여 농민군 토벌에 발벗고 나섰다. 전봉준은 9월 14일 삼례에서 각지에 반일기의를 호소하고, 항일전쟁을 위한 군비를 준비하여 10월 14일 삼례를 출발, 논산에 둔거하면서 농민군을 널리 모집하여 2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전봉준은 여러 차례 경군과 충청감영군 그리고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항일을 위한 민족연합전선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10월 24일 공주로 진격하여 이후 11월 10일까지 약 2,500명의 정부군 및 약 200명의 일본군과 2차례에 걸쳐 처절한 공주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제2차 농민전쟁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 전봉준이 목적했던 것은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친일적인 개화파정권을 타도하며 나아가 '몇 사람의 명망가의 합의법'에 의한 권력기구를 수립함으로써 전국의 차원에서 폐정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군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법무아문권설재판소에서 5차에 걸쳐 재판을 받은 후, 3월 29일 사형을 언도받았고, 그날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과 함께 처형당했다.
  • 가격1,000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04.11.27
  • 저작시기2004.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560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