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자연인문환경
삼계면의 지명
삼계면의 행정
1. 삼한 시대
2. 백제 시대
3. 통일신라 시대
4. 고려 시대
5. 조선조 시대
6. 일제 시대
7. 해방 후 미군정 시대
8. 정부수립 후 행정
9. 5·16군사정변 이후
10. 지방자치 실시
문화재
학정리 석불, 만취정, 노동환 가옥, 광제정, 오괴정(五槐亭)
인물
이윤(李潤), 양희적(楊希迪), 김인식(金寅植), 허 박(許撲), 허 섭(許 燮),
한인석, 한돈석(韓敦錫), 하용봉, 한석효, 허 주(許柱), 한상준(韓相駿)
참고문헌
삼계면의 지명
삼계면의 행정
1. 삼한 시대
2. 백제 시대
3. 통일신라 시대
4. 고려 시대
5. 조선조 시대
6. 일제 시대
7. 해방 후 미군정 시대
8. 정부수립 후 행정
9. 5·16군사정변 이후
10. 지방자치 실시
문화재
학정리 석불, 만취정, 노동환 가옥, 광제정, 오괴정(五槐亭)
인물
이윤(李潤), 양희적(楊希迪), 김인식(金寅植), 허 박(許撲), 허 섭(許 燮),
한인석, 한돈석(韓敦錫), 하용봉, 한석효, 허 주(許柱), 한상준(韓相駿)
참고문헌
본문내용
-건립연대 : 1545년, 중건 1922년
- 구조 : 팔작지붕, 겹처마
- 규모 : 정면 3칸, 측면 2칸
인물
이 윤(李潤)
퇴사(退思) 이윤은 중종 29년(1534) 경주 이씨로 현감이었던 이주신(李周臣)의 아들로 태어났다. 음사(蔭仕: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의 자제들에게 벼슬을 주는 일)로 헌릉참봉(獻陵參奉)과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랐으나, 조정의 당파싸움이 추잡한 양상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 호를 퇴사라고 하였다. 삼계면의 사인동(舍人洞)에서 자연을 벗삼고 지내던 선생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금산(錦山) 조헌(趙憲)이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막장(幕將)이 되어 싸우다가 8월 18일 왜병의 포위 속에서 장렬히 싸우다가 7백 의사(義士)와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는 선생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추증하였다.
양희적(楊希迪)
명종 10년(1555) 삼계면 삼계리에서 태어났다. 임진란 당시 38세로 유팽로·양대박과 함께 고경명 장군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칠 것을 건의, 창의소를 설치하고 궐기하였다. 고경명 장군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유팽로·양대박은 종사관이 되었으며 양사형·이대윤·최상중은 군량을 모으는 모량유사가 되고 양희적과 박천정은 양곡과 군기를 보급하는 부전운량장(赴戰運糧將)이 되어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였다. 전란이 끝나고 내선사 판관(內膳寺 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부모에 효도하고 지냈다.
김인식(金寅植)
1874년(고종 11) 삼계면 후천리에서 태어났다. 장성하여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가 애국지사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나라를 걱정하다가 1905년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애국동지들과 활동을 하였다. 1970년 매국노 박제순과 이지용을 살해하기 위하여 고국에 돌아와 시한폭탄을 보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자신회(自信會)라는 애국단체를 조직하여 매국노들을 암살하는 선두에 섰다. 그러나 무고한 백성들이 대신 잡혀 고문을 당하자 자진하여 경찰에 출두하여 살인 강도범으로 처형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마침 박영효가 일본에서 돌아와 도움을 주어 5년간 진도(珍島)에 유배형을 당하는 것으로 줄었다. 유배가 끝나고 3·1운동 때에는 의병대장 윤영기와 독립운동에 앞장서 투쟁하며 일본 경찰의 탄압에 고초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허 박(許撲)
1876년(고종 13)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일본의 조선 침략을 미워하여 동지를 구하여 조직적인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풍부한 학식과 좋은 언변으로 대중을 설득하였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로 일본의 부도덕을 규탄하고 있었다. 때마침 맨 앞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3월 15일에 세 번째 궐기가 시작됐는데 남원과 임실 헌병대가 동원되어 이날의 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었다. 이때 용감한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맨 앞에서 흥분하여 군중을 선동하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본 헌병은 현장에서 선생을 체포하여 총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선생의 나이는 44세, 나라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자신을 던져 조국의 독립은 간절히 원하는 민족의 염원을 들어내 보인 것이다. 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허 섭(許 燮)
1890년 삼계면 덕계리에서 출생,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하여 8개월의 옥살이를 하였다. 왜경들에게서 받은 고문으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한인석
1893년 임실군 삼계면 용가리에서 출생, 3·1운동 당시 27세이던 선생은 면민들을 지도하는 위치에서 거사를 준비하고 만세운동의 대열에 앞장섰다. 일경에 체포되어 전주 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 받았다.
한돈석(韓敦錫)
1894년 삼계면 어은리에서 태어났다. 평소 일본의 침략을 미워하던 선생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면민들의 선봉에서 면민의 항일운동을 지휘하고 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어 대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언도 받았다. 선생은 대구 형무소로 끌려가면서 추풍령 고개에 이르자 하일소개만리운(何日掃開萬里雲) 쾌연복관해동천(快然復觀海東天) -어느 때에 만리 구름이 걷히어 밝은 해와 달을 볼거나 - 이라 읊조리며 나라 잃은 설움을 삭였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선생은 감옥에서 얻은 신병과 울분을 가눌 길 없어 세상을 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하용봉
삼계면 어은리에서 출생, 3·1운동 당시 오수 장날 만세운동을 선두에서 지휘하였다가 수일후 왜경에게 체포되어 동지들의 성명과 숨은 곳을 자백하라는 매질과 고문을 받고 이송된 전주형무소에서 거식(拒食)으로 항거하기도 하였다.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한석효
1887년 삼계면에서 한은홍(韓恩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하루는 병환중인 아버지가 죽순을 먹기를 원하는데 때는 겨울철이라 죽순을 구할 수가 없었다. 대밭에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니 하늘이 감동하여 죽순 세 개가 솟아 이것을 아버지에게 드려 병환에서 회복되게 하였다. 나라에서도 하늘이 내린 효자라며 동몽교관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를 증직하고 효자 정려의 은전을 베풀었다.
허 주(許柱)
1879년(고종 16) 삼계면 덕계리에서 태어났다. 27세에 성균관 박사에 발탁되었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향에 돌아와 형 허간(許侃)과 후진교육에 전력을 다 하였다. 1924년 한해로 흉년이 들자 산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도록 가르치고 밤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동민들이 담당하여 관리하게 하는 등 농촌 소득증대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저서로는 파릉세고(巴陵世稿) 7권과 금관씨종약소 발기문(金管氏宗約所發起文)등이 있다.
한상준(韓相駿)
1921년 8월 25일 삼계면 어은리에서 출생, 초대 전라북도 교육위원·제2대 전라북도의회의원에 당선되었고, 5-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보사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초대해외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하였고 1988년 6월 15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삼계면사」 김교영, 삼계면사편찬위원회(2000).
http://www.imsil.go.kr/
- 구조 : 팔작지붕, 겹처마
- 규모 : 정면 3칸, 측면 2칸
인물
이 윤(李潤)
퇴사(退思) 이윤은 중종 29년(1534) 경주 이씨로 현감이었던 이주신(李周臣)의 아들로 태어났다. 음사(蔭仕: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의 자제들에게 벼슬을 주는 일)로 헌릉참봉(獻陵參奉)과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랐으나, 조정의 당파싸움이 추잡한 양상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 호를 퇴사라고 하였다. 삼계면의 사인동(舍人洞)에서 자연을 벗삼고 지내던 선생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금산(錦山) 조헌(趙憲)이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막장(幕將)이 되어 싸우다가 8월 18일 왜병의 포위 속에서 장렬히 싸우다가 7백 의사(義士)와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는 선생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추증하였다.
양희적(楊希迪)
명종 10년(1555) 삼계면 삼계리에서 태어났다. 임진란 당시 38세로 유팽로·양대박과 함께 고경명 장군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칠 것을 건의, 창의소를 설치하고 궐기하였다. 고경명 장군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유팽로·양대박은 종사관이 되었으며 양사형·이대윤·최상중은 군량을 모으는 모량유사가 되고 양희적과 박천정은 양곡과 군기를 보급하는 부전운량장(赴戰運糧將)이 되어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였다. 전란이 끝나고 내선사 판관(內膳寺 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부모에 효도하고 지냈다.
김인식(金寅植)
1874년(고종 11) 삼계면 후천리에서 태어났다. 장성하여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가 애국지사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나라를 걱정하다가 1905년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애국동지들과 활동을 하였다. 1970년 매국노 박제순과 이지용을 살해하기 위하여 고국에 돌아와 시한폭탄을 보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자신회(自信會)라는 애국단체를 조직하여 매국노들을 암살하는 선두에 섰다. 그러나 무고한 백성들이 대신 잡혀 고문을 당하자 자진하여 경찰에 출두하여 살인 강도범으로 처형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마침 박영효가 일본에서 돌아와 도움을 주어 5년간 진도(珍島)에 유배형을 당하는 것으로 줄었다. 유배가 끝나고 3·1운동 때에는 의병대장 윤영기와 독립운동에 앞장서 투쟁하며 일본 경찰의 탄압에 고초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허 박(許撲)
1876년(고종 13)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일본의 조선 침략을 미워하여 동지를 구하여 조직적인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풍부한 학식과 좋은 언변으로 대중을 설득하였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로 일본의 부도덕을 규탄하고 있었다. 때마침 맨 앞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3월 15일에 세 번째 궐기가 시작됐는데 남원과 임실 헌병대가 동원되어 이날의 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었다. 이때 용감한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맨 앞에서 흥분하여 군중을 선동하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본 헌병은 현장에서 선생을 체포하여 총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선생의 나이는 44세, 나라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자신을 던져 조국의 독립은 간절히 원하는 민족의 염원을 들어내 보인 것이다. 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허 섭(許 燮)
1890년 삼계면 덕계리에서 출생,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하여 8개월의 옥살이를 하였다. 왜경들에게서 받은 고문으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한인석
1893년 임실군 삼계면 용가리에서 출생, 3·1운동 당시 27세이던 선생은 면민들을 지도하는 위치에서 거사를 준비하고 만세운동의 대열에 앞장섰다. 일경에 체포되어 전주 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 받았다.
한돈석(韓敦錫)
1894년 삼계면 어은리에서 태어났다. 평소 일본의 침략을 미워하던 선생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면민들의 선봉에서 면민의 항일운동을 지휘하고 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어 대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언도 받았다. 선생은 대구 형무소로 끌려가면서 추풍령 고개에 이르자 하일소개만리운(何日掃開萬里雲) 쾌연복관해동천(快然復觀海東天) -어느 때에 만리 구름이 걷히어 밝은 해와 달을 볼거나 - 이라 읊조리며 나라 잃은 설움을 삭였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선생은 감옥에서 얻은 신병과 울분을 가눌 길 없어 세상을 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하용봉
삼계면 어은리에서 출생, 3·1운동 당시 오수 장날 만세운동을 선두에서 지휘하였다가 수일후 왜경에게 체포되어 동지들의 성명과 숨은 곳을 자백하라는 매질과 고문을 받고 이송된 전주형무소에서 거식(拒食)으로 항거하기도 하였다.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한석효
1887년 삼계면에서 한은홍(韓恩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하루는 병환중인 아버지가 죽순을 먹기를 원하는데 때는 겨울철이라 죽순을 구할 수가 없었다. 대밭에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니 하늘이 감동하여 죽순 세 개가 솟아 이것을 아버지에게 드려 병환에서 회복되게 하였다. 나라에서도 하늘이 내린 효자라며 동몽교관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를 증직하고 효자 정려의 은전을 베풀었다.
허 주(許柱)
1879년(고종 16) 삼계면 덕계리에서 태어났다. 27세에 성균관 박사에 발탁되었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향에 돌아와 형 허간(許侃)과 후진교육에 전력을 다 하였다. 1924년 한해로 흉년이 들자 산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도록 가르치고 밤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동민들이 담당하여 관리하게 하는 등 농촌 소득증대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저서로는 파릉세고(巴陵世稿) 7권과 금관씨종약소 발기문(金管氏宗約所發起文)등이 있다.
한상준(韓相駿)
1921년 8월 25일 삼계면 어은리에서 출생, 초대 전라북도 교육위원·제2대 전라북도의회의원에 당선되었고, 5-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보사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초대해외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하였고 1988년 6월 15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삼계면사」 김교영, 삼계면사편찬위원회(2000).
http://www.imsi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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