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평양천도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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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들여졌다.
실제로 평양천도 루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남진정책의 주된 대상은 백제였다. 고구려의 왕실과 백제 왕실은 같은 부여 계통이었지만 그 주도권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심각하게 대립했던 것이다.
평양 천도의 장본인은 장수왕의 증조부 고국원왕은 바로 백제의 정복군주 근초고왕에게 전사했던 인물이었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서기 371년 평양성까지 북진하자 고구려 왕실이 평양 천도 후 남하정책을 전개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또한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고구려에 유리하게 돌아간 국제 정세도 한몫을 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라 불리는 분열시대여서 내부적 다툼에 바빴으므로 다른 지역의 정세에 개입할 여지가 적었던 것이다. 중국 화북 지역을 무대로 한 북조는 여러 이민족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에 의해 통일 되었으며 화남지역을 부대로 하는 남조는 동진, 송, 남제가가 차례로 흥망을 거듭하고 있었다.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 남조의 동진에 사신을 파견해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 교섭을 재개했다. 이후 동진을 이은 송과 남제와도 계속해서 국교를 수립해 중국 남조 국가들과 유대를 강화 했는데 여기에는 백제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장수왕의 강한 의도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북위가 화북 지역을 통일할 기미를 보이자 장수왕은 재위 23년에 북위에도 사절을 파견해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적어도 북위가 적대국화 하려는 것은 막으려고 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처럼 중국이 분열된 틈을 이용해 남북조 모두와 국교를 수립해 간섭을 배제하면서 남하정택을 강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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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4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8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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