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 국가의 특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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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고구려사의 동아시아에서의 위상
1. 당당한 천하의 대제국
1) 고구려의 특징
2) 중국과의 긴장관계
3) 고구려의 문화
4) 고구려의 영역과 진출 방향
2. 빼어난 석조문화의 만개
1) 고구려족의 특성과 출자와 기원
2) 고구려인들이 가진 돌로 된 성과 무덤의 함축적 의미
3) 고구려 시대의 돌의 채집과 운송의 담긴 의미
4) 고구려의 산성
5) 고구려의 고분
6) 석조문화와 고분벽화와의 결합
3. 낙천적인 멋과 여유를 즐긴 고구려인
1) 고구려의 풍속
2) 고구려의 인물

[2] 백제사의 고대적 역할
1. 한강유역의 확보와 그 개발
1) 한강 입지의 중요성
2) 백제의 입장에서 한강의 중요성
3) 백제와 한강의 상실
2. 고대 왕국의 조기 완성과 전제 왕권의 성립
1) 백제의 왕국 설립 시기와 왕국의 정치 제도 발전 시기
2) 왕권의 절대화와 사치
3) 왕권의 절대화 노력
3. 일본문화의 개발
1) 백제의 국가성장
2) 근거
3)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 특징

본문내용

(신라)의 위협을 미처 막지 못하고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남천 이후 백제는 보다 적극적인 농업개발정책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강유역의 상실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반감은 금강 영산강유역의 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높여 주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남천은 새로운 영농기술의 개발보다는 귀족갈등에 따른 정치적 어려움이 잇달아 권농책의 추진은 뒷걸음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3) 백제와 한강의 상실
결국 한강유역의 유리한 자연환경과 역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발전한 백제는 그 개발보다 보존의 어려움으로 그 지역이 갖고 있는 잠재적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한강유역의 확보에 국력이 탕진됨으로써 전반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구나 웅진천도 이후 귀족간의 갈등으로 경제개발에 실패함으로써 일련의 정치개혁에 한계점을 드러내었다.
백제는 한강유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방 유이민 집단에 의한 지배력으로 국가로 성장하는 동시에 호남지방의 독자적인 청동기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마한세력과 대처하면서 발달하였다. 한성백제 말기의 정치적 시련은 호남지역 토착세력의 흡수, 동화에 한계를 갖게 되었다.
2. 고대 왕국의 조기 완성과 전제 왕권의 성립
1) 백제의 왕국 설립 시기와 왕국의 정치 제도 발전 시기
백제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3국 중에 가장 늦게 성립된 나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국초부터 장자상속의 전통이 이루어져 있고 이미 3세기에 6좌평을 위주로 한 관제의 정비나 4세기의 국사 편찬[근초고왕때의 서기(書記)] 및 율령 반포가 이루어 졌다. 또한 사당, 제단, 궁궐, 방어시설[설책(設柵), 축성(築城)]을 조성하고 있는 점과 백제왕들의 대왕(大王) 제도와 평균 21.9년인 재위 기간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가 3국 중 가장 일찍이 왕권이 강력한 국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 비트포겔Wittfogel의 『동방 전제정』에서 고대 동방 전제 군주의 특징
① 대규모 토목공사 - 치수 관개 시설
② 거대한 방어 시설의 축조 - 축성, 설책,
③ 분묘와 신전
2) 왕권의 절대화와 사치
백제왕은 수시로 지방을 순행하여 중앙과 지방의 법규와 풍속을 하나로 묶으려 하였다. 이런 왕권의 절대화 과정에서는 장엄한 궁궐의 조성이 필요하였다. 특히 빈번한 순행은 별궁의 건축을 필요로 했다. 삼국사기에도 이런 빈번한 축성과 궁성 개축의 기사가 나온다. 게다가 진사왕은 고구려의 남하에 따라 국가적인 시련이 계속되는 과정에서도 궁실을 중수하여 못을 파고 산을 만들며 기이한 동식물을 길렀고 동성왕은 한강 지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후 웅진으로 천도 후 신하의 반대에도 궁실에 누각을 세우고 못을 파고 진귀한 동식물을 길렀다. 또한 사비 도성(都城)의 규모는 평지성 343만평, 산성 9만여평 등 총 352만평으로 왕궁과 나성(羅城)을 웅장하게 축조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에도 축조된 이런 건축물들은 백제왕의 전제 왕권 확립 노력의 증거이다.
? 순행과 축성, 궁성 개축이 꼭 사치나 불필요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
! 물론 『한국의 고대사』 저자는 궁궐의 누각이나 진귀한 동식물기르기는 사치로서 백제의 힘을 분산시켜 결국 멸망에 일조했다고 해석하고 있으나, 3국 중 가장 일찍이 왕권이 강화되었던 백제 내부의 입장에서 순행이나 커다란 궁궐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의례 행사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순행이 계속되지 않고 궁궐이 어느 정도 규모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귀족들에게 왕의 권력이 약화되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게 되어 결국 왕권의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백제 왕들은 그렇게 순행이나 궁성 개축에 신경을 썼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가능하다. 또한 이런 건축과정에서 비트포겔Wittfogel의 『동방 전제정』에서 설명하는 원리에 따라 왕권이 약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3) 왕권의 절대화 노력
성왕은 실세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에서 벗어나 관료제도를 바탕으로한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를 추진하였고, 22부의 운영에 있어서 내 외관에 사정(司正) 감찰(監察) 기관을 두지 않는 등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 위덕왕은 성왕 패사(敗死)로 인해 약해진 전제왕권의 강화를 위해 대 신라 고구려와의 전쟁을 꾀하였고 동시에 5제신과 구태묘(仇台廟, 사당)에 대한 정기적 제의와 국사 편찬을 통해 왕의 권위를 정당화 하였고, 무왕은 익산의 별도(別都) 경영과 미륵사, 왕흥사 등의 창건으로 왕권의 전제화를 과시할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전제 정권 확립 노력은 의자왕의 정치적 개혁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귀족 세력을 억압하고 서자 41명의 좌평임명과 같은 친위세력의 확장은 그 개혁 정치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 성왕, 위덕왕, 무왕, 의자왕으로 이어지는 왕권의 절대화 노력은
한강 유역을 잃은 후 백제 왕권이 너무나 약해져서 상대적으로 강하게 된 귀족의 권력과 경쟁 중이었다는 반증이다.
3. 일본문화의 개발
1) 백제의 국가성장
적산항로의 개척(4세기 이후)⇒ 요서의 진출
온조직계의 왕통확립과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 극복 ⇒ 왜국과의 접근
2) 근거
① 북학학계
- “선진영농과 상업기술의 일본 전수로 보면서 백제계통의 고마후국의 성립”으로 봄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
백제 일본 < >신라
우호친선관계 대립충돌관계
② 문헌근거
▶「삼국사기」
ⅰ) 고구려 남하정책: 관미성 함락 시 ⇒ 왜국과 교섭(지속적인 친선유지)
ⅱ) 나 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멸망 시 ⇒ 파병한 사실
ⅲ) 백제와 왜와 한 차례의 싸움사실 없음.
▶「일본서기」- 일본의 백제 침입의 의미
ⅰ) 문화적 욕구
ⅱ) 진귀한 보물 ‘완호진물(玩好珍物)’에 대한 욕구
ⅲ) 문화 선진국에 대한 학문적 욕구
⇒ 유학 불교 예술 의약 등 전반적인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에 영향
3)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 특징
▶ 백제불교 문화의 전파 - 도일(度日)승려의 수(6세기~ 7세기말)
- 법흥사(飛鳥寺)건립, 사찰 참석자의 백제의복 착용
▶ 백제멸망 후(660년) - 일본 고대문화(飛鳥文化)로 부할
┎ 백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청동)
┖ 일본: 광륭사 반가사유상(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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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5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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