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일본의 신도, 신사
2. 신도의 역사
1)신도의 국교화
2)신사신도의 비종교화
3. 신사참배의 배경과 신사과정
1)1910-20년대의 신사문제
4. 일제의 신사참배 과정과 강요
1) 조선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
2) 기독교 학교에 대한 참배 강요
3) 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5. 신사참배 반대 운동
1) 평양 신학교 학생들의 반대 운동.
2) 선교사들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
3)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
4) 체제 안에서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
5) 개인적인 반대 운동.
6. 신사참배이후의 교회재건과 분열
1) 북한교회의 재건
2) 남한교회의 재건
3) 고려파 분열
7. 신사참배를 마무리하며..
2. 신도의 역사
1)신도의 국교화
2)신사신도의 비종교화
3. 신사참배의 배경과 신사과정
1)1910-20년대의 신사문제
4. 일제의 신사참배 과정과 강요
1) 조선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
2) 기독교 학교에 대한 참배 강요
3) 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5. 신사참배 반대 운동
1) 평양 신학교 학생들의 반대 운동.
2) 선교사들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
3)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
4) 체제 안에서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
5) 개인적인 반대 운동.
6. 신사참배이후의 교회재건과 분열
1) 북한교회의 재건
2) 남한교회의 재건
3) 고려파 분열
7. 신사참배를 마무리하며..
본문내용
표시를 하였고 북한정권은 모든 것이 각본대로 이루어지자 박해시작을 가하였다.
2) 남한교회의 재건
한편 남한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지역에서 교회재건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순교자나 출옥성도들의 출생지이거나 목회지역이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18일에는 경남재건노회가 결성되고, 이어 1947년에는 출옥성도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대다수 교역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고, 그 영향으로 장로교가 심각한 분열의 상태에 빠지는 등 오히려 교회분열의 씨앗이 되는
역효과만 낳은 채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3) 고려파 분열
한국의 기독교는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싸고 8·15해방 후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한교회 재건의 중심지였던 경남노회는 신사참배를 죄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참회와 자복(自服)을 가장 강력하게 요구했다. 경남은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의 출생지이자 주남선·한상동 목사 등 출옥성도의 영향력이 컸던 지역이다. 이들은 1945년 9월 18일 부산진교회당에서 경남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일제강점기 동안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현직 교직자들의 자숙을 촉구하는 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당시 남한 기독교계의 전체적 분위기는 신사참배의 회개보다는 교단의 존립 및 미군정하에서의 정치적 역할에 치중하는 등 기득권의 확보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경남노회의 이러한 회개와 갱신의 노력은 오히려 예외적인 흐름이었으며, 결국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1946년 경남노회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으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한상동 목사의 김길창 목사 제명 동의 등 부패 노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투쟁, 몇차례의 정기노회와 임시노회를 열어 신사참배 자숙안에 대한 논란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노회가 양분되었다.
그래서 남한기독교의 참회와 재건운동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고려신학교는 한상동목사가 조남선목사와 함께 설립한 학교, 박형용박사를 교장으로 만주에서 모시고 오리고 했으나 박사의 귀국이 지연되자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결국 경남노회와의 문제가 어려움속에서 지탱되어 오다가 1949년 4월 35회총회는 고려신학교가 총회와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함으로써 고려파라는 새로운 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경남노회는 1948년 12월에 고려신학교의 인정을 취소. 1951년 5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모인 제 36회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자들과의 단절선언을 하였다.
1952년 고신측은 독자적인 교단출범.
7. 신사참배를 마무리하며..
신사참배는 단지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하나로 착수되었다는 것이다. 일제의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의 형태는 먼저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대한 참배강요로 이어졌다. 이는 바로 그들의 식민지 정책의 성공적인 감행을 위해서는 주저항 요소가 바로 기독교임을 인지하였고, 백방으로 기독교 박멸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여, 기독교 학교와 교회로 부터 강요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명목으로 신사참배 결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항하여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던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신사참배에 대한 영적 지도자들의 3가지 대응 방법(저항, 도피, 순응)을 알 수 있는데 실제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레포트를 작성하는 우리들도 각자 도피하거나 자신의 의견보다는 대의에 순응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과정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반대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신학교와 신학생들의 반대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퇴학이라는 치명적인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철저히 지켰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은 역사의식도 없이 안일하게 신학하는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경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는 천주교로 말미암아 어려움 없이 이민족에게 전파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전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대부흥을 단시간 내에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러나, 기독교는 곧 일본을 통해 신사참배라는 커다란 고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커다란 고난은 우리에게 순교와 기독교 분열이라는 아픔을 낳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고난을 통해 우리의 순수한 복음이 비록 소수였지만 소수에 의해 더욱 단련된 복음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이고 나아가서는 그후에 일어난 한국 교회의 분열이 전도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한국 기독교는 약 11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의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무릎쓰고 지켜왔던 선배들의 신앙의 순수함들이 이제는 많이 오염되고 사라진 모습을 보게된다. 현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교회도 물량화.대량화되어 가며 기복적인 신앙과 자기 중심적인 신앙에 빠져 더 이상 전도하지 않으며 교회의 성도들이 자꾸 대형교회로 수평 이동하고 있으며 예배도 현대인의 필요에 따라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한국교회의 위기의식을 절감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과거 역사를 돌아보고 우리의 역사의식을 새롭게 하여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때인 것 같다. 현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역사관점에서 민족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던 예레미야와 느혜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참 고 문 헌
구라타 마사히코 [일제의 한국 기독교 탄압사], 기독교문사, 1991.
안도명 [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 혜선 출판사, 1991.
김승태 엮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한국기독교욕사연구소, 1991.
김승태 엮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의 증언 어둠을이긴사람들], 다산글방, 1993.
이진구 [신사참배에 대한 조선 기독교계의 대응양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1989
신경구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대응],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5
차흥도 [신사참배와 그영향에 관한 소고], 1985
2) 남한교회의 재건
한편 남한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지역에서 교회재건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순교자나 출옥성도들의 출생지이거나 목회지역이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18일에는 경남재건노회가 결성되고, 이어 1947년에는 출옥성도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대다수 교역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고, 그 영향으로 장로교가 심각한 분열의 상태에 빠지는 등 오히려 교회분열의 씨앗이 되는
역효과만 낳은 채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3) 고려파 분열
한국의 기독교는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싸고 8·15해방 후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한교회 재건의 중심지였던 경남노회는 신사참배를 죄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참회와 자복(自服)을 가장 강력하게 요구했다. 경남은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의 출생지이자 주남선·한상동 목사 등 출옥성도의 영향력이 컸던 지역이다. 이들은 1945년 9월 18일 부산진교회당에서 경남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일제강점기 동안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현직 교직자들의 자숙을 촉구하는 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당시 남한 기독교계의 전체적 분위기는 신사참배의 회개보다는 교단의 존립 및 미군정하에서의 정치적 역할에 치중하는 등 기득권의 확보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경남노회의 이러한 회개와 갱신의 노력은 오히려 예외적인 흐름이었으며, 결국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1946년 경남노회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으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한상동 목사의 김길창 목사 제명 동의 등 부패 노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투쟁, 몇차례의 정기노회와 임시노회를 열어 신사참배 자숙안에 대한 논란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노회가 양분되었다.
그래서 남한기독교의 참회와 재건운동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고려신학교는 한상동목사가 조남선목사와 함께 설립한 학교, 박형용박사를 교장으로 만주에서 모시고 오리고 했으나 박사의 귀국이 지연되자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결국 경남노회와의 문제가 어려움속에서 지탱되어 오다가 1949년 4월 35회총회는 고려신학교가 총회와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함으로써 고려파라는 새로운 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경남노회는 1948년 12월에 고려신학교의 인정을 취소. 1951년 5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모인 제 36회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자들과의 단절선언을 하였다.
1952년 고신측은 독자적인 교단출범.
7. 신사참배를 마무리하며..
신사참배는 단지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하나로 착수되었다는 것이다. 일제의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의 형태는 먼저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대한 참배강요로 이어졌다. 이는 바로 그들의 식민지 정책의 성공적인 감행을 위해서는 주저항 요소가 바로 기독교임을 인지하였고, 백방으로 기독교 박멸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여, 기독교 학교와 교회로 부터 강요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명목으로 신사참배 결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항하여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던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신사참배에 대한 영적 지도자들의 3가지 대응 방법(저항, 도피, 순응)을 알 수 있는데 실제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레포트를 작성하는 우리들도 각자 도피하거나 자신의 의견보다는 대의에 순응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과정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반대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신학교와 신학생들의 반대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퇴학이라는 치명적인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철저히 지켰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은 역사의식도 없이 안일하게 신학하는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경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는 천주교로 말미암아 어려움 없이 이민족에게 전파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전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대부흥을 단시간 내에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러나, 기독교는 곧 일본을 통해 신사참배라는 커다란 고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커다란 고난은 우리에게 순교와 기독교 분열이라는 아픔을 낳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고난을 통해 우리의 순수한 복음이 비록 소수였지만 소수에 의해 더욱 단련된 복음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이고 나아가서는 그후에 일어난 한국 교회의 분열이 전도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한국 기독교는 약 11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의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무릎쓰고 지켜왔던 선배들의 신앙의 순수함들이 이제는 많이 오염되고 사라진 모습을 보게된다. 현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교회도 물량화.대량화되어 가며 기복적인 신앙과 자기 중심적인 신앙에 빠져 더 이상 전도하지 않으며 교회의 성도들이 자꾸 대형교회로 수평 이동하고 있으며 예배도 현대인의 필요에 따라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한국교회의 위기의식을 절감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과거 역사를 돌아보고 우리의 역사의식을 새롭게 하여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때인 것 같다. 현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역사관점에서 민족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던 예레미야와 느혜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참 고 문 헌
구라타 마사히코 [일제의 한국 기독교 탄압사], 기독교문사, 1991.
안도명 [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 혜선 출판사, 1991.
김승태 엮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한국기독교욕사연구소, 1991.
김승태 엮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의 증언 어둠을이긴사람들], 다산글방, 1993.
이진구 [신사참배에 대한 조선 기독교계의 대응양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1989
신경구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대응],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5
차흥도 [신사참배와 그영향에 관한 소고],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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