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은 어떻게 통일 대업을 이룩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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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왕건은 어떻게 통일 대업을 이룩하였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견훤과 왕건의 비교§
1. 견훤과 왕건의 경제 시책
2. 견훤과 왕건의 호족 시책
3. 견훤과 왕건의 외교 시책

§궁예·왕건·견훤§
1. 궁예
2. 왕건
3. 견훤

본문내용

양은 고구려의 도읍이고, 패수는 화족과 배달겨레의 경계선을 나누는 강의 이다. 따라서 진훤은 옛 신라 땅을 '평정'한 뒤 나중에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던 발해까지 무릎꿇려 삼한을 '백제'라는 이름으로 차지하고 싶어했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김궁예나 왕건뿐만 아니라 진훤도 옛 고구려 땅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곳을 백제의 땅으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진훤과 왕건의 정권의 관등 명칭과 그 체계에 대해서 진훤에 대해서는 “견훤은 백제 유민들의 백제 부흥 의지를 이용만 하였을 뿐 이에 대한 대책과 배려에 힘쓰지 않았다.”라고 비판한데 비해, 궁예에 대해선은 “견훤과는 자못 다른 모습을 보였다.”라 평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궁예는 신라의 제도를 의거하여 백관을 설치했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왕건이 집권하여 임명한 신료들 역시 어김없이 이찬, 소판, 한찬, 파진찬, 증아찬, 알찬, 일길찬과 같은 신라계 관등을 지니고 있었다. 진훤, 궁예, 왕건 정권 모두 신라계 관등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훤에게는 ‘개혁의지 부족’이라는 평이 내려진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같은 주장은 진훤에 대한 편견일 따름이다. 누가 보더라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사실까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훤 죽이기’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허스트 3세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왕건과 견훤 그리고 궁예는 사료들 속에서 심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역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성스럽거나 악한 존재만은 아니였다고 생각된다. 그들 모두는 사전에 결정되어 있는 역사 대본 속에 꼭 필요한 배우들이였으며, 역사가들이 역사를 편찬하던 그 시점에 특수한 정치적 목적으로 여러 가지 배역을 배정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 세명은 역사서에서 실제 모습보다 과장되게 나타내고 있으며 마치 고려왕조 창건과 연계된 후삼국시대 3명의 리더 가운데 최종 승자인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속의 배역처럼 기록되어있다.
현전하는 역사 기록은 결과론에 입각한, 적어도 이긴 자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패배자에게는 패할 수밖에 없는 당위적인 이유룰 붙이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왕건이 후삼국의 쟁패전에서 패배하여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왕건이 역사의 패자로 전락했다면 야심만 가지고 궁예를 축출한 데 따른 자업자득이라는 냉소와 혹평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조의 입장이다. 현재의 역사기록은 “어쨌든 이기고 봐야 된다.” 또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말이 행세하며 결과론적인 평가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또한 왕건은 숱한 패전과 운명의 고비고비를 힘겹게 넘기고 있었을 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최종의 승자이기에 허다한 패전 사실이 축소 혹은 은폐되어 전해지고 있다. 역사에서 묘사된 것처럼 왕건은 마냥 사람 좋은 호인만은 아니였다. 모든 것이 치밀한 계획아래 이루어 졌던 것들이였으며 그가 승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역사를 서술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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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5.01.28
  • 저작시기2005.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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