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성립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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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대가야의 성립

Ⅲ. 대가야의 정치?사회구조

Ⅳ. 대가야의 대외관계

Ⅴ. 대가야의 신앙과 의례

Ⅵ. 대가야의 불교

Ⅶ. 대가야 묘제의 변천

Ⅷ. 토기로 본 대가야의 권역과 그 변천

Ⅸ. 대가야의 멸망

Ⅹ. 결론

본문내용

립한 이후로 점차 그 분포를 넓혀가며 또 각 지역에서 처음에는 재지계 토기와 공존하다가 나중에는 일색을 이루는 양상을 보인다.
고령양식의 특징적인 토기들이 합천, 거창, 함양, 남원 등 주로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대가야의 활동영역이 이 방면으로 미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믿어지며, 이들 지역의 연계가 단순히 정치적 紐帶 관계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토기상으로 볼 때 이들 지역은 같은 고고학적 문화권에 속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Ⅸ. 大伽耶의 멸망
대가야의 멸망원인은 먼저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들 수 있다. 낙동강과 그 지류, 소백산맥과 그 지맥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작은 분지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집단들은 서로간 우열을 가늠할 수 없을만큼 비슷한 세력을 유지하며 성장하였고, 특히 하나의 통일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진한과 마한지역을 일찍 통합한 신라와 백제의 대외진츨로 가야제국의 균형은 깨어지고 대가야 등이 부상하게 되었으며 특히 대가야는 백제와 연합 또는 신라와 결혼동맹 등을 맺으며 세력을 유지, 한때 그 영역은 서쪽으로 섬진강유역까지 미쳤다.
그러나, 신라와의 결혼동맹이 파기되고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의 일부가 신라에 복속되자 대가야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라와 마주하게 되어 친백제정책으로 기울어졌다. 지리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완충지대에 위치하는 관계로 친신라, 친백제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유지되어왔던 대가야로서는 낙동강 이서로의 진출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신라와 접하게 되자 자연히 백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와의 임나부흥회의를 통하여 나름대로 자구책을 모색하기도 하였지만 그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대가야는 결혼동맹 파탄이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되어,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관산성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희진은 관산성전투의 참전은 가야의 자발적인 참전이 아니라 백제에 부용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자, 가야제국은 큰 피해를 입은 채 멸망 직전에 몰리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희진은 관산성전투의 패배가 백제나 가야에게 그다지 큰 타격을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가야제국은 신라에게 무력으로 정복되었다기보다 백제에게서 벗어나려는 방편으로 신라의 지원에 의존하려 하다가 오히려 신라에 역이용당하여 정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관산성전투가 가야에게 그다지 큰 충격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김태식은 관산성전투에 상당히 큰 규모의 가야군이 동원되었을 것이라며 관산성전투의 결과 백제는 가야에 대한 先占權을 상실하게 될 뿐이었고, 가야연맹제국은 큰 피해를 입은채 멸망 직전까지 몰리게 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후 신라는 555년부터 약 3년간에 걸쳐 한강유역을 경영하고 나서, 가야연맹제국에 대한 병합에 착수하여 강압과 회유를 시도하였으며, 이에 대해 안라는 559년에 쉽사리 투항한 듯 하다. 560년 이후 신라사신이 왜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안라를 비롯한 가야남부지역 일부 소국들의 신라투항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북부지역은 자체의 세력기반도 있는 데다가 그 동안 친백제의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신라에 대하여 저항자세를 취한 듯 하다. 그리하여 신라는 561년에 昌寧지역에 진흥왕 및 四方軍主가 모여서 무력 시위를 하고, 562년에는 반신라세력의 중심인 대가야를 기습적으로 함락시켰으니 이를 전후하여 나머지의 가야소국들도 무너진 것이다.
Ⅹ. 결론
지금까지 대가야의 성립과 멸망에 이르는 동안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대가야는 독자적인 대외관계를 통해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권력집중화, 철산의 개발로 금관가야가 주도하였던 가야와 왜와의 교역관계를 장악하게 된다. 또, 산성축조 등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 등에서 力役動員 또는 수탈을 행했다. 그리고,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볼 수 있듯 대규모의 순장이 행해졌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아, 대가야는 고대국가단계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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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대가야,   가야,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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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5.03.27
  • 저작시기2005.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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