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역사-관덕정, 제주목관아지, 제주읍성
본 자료는 1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해당 자료는 1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제주의 역사
탐라국의 성립
백제에 복속
신라에 입조
고려에 입조
원의 지배
조선의 제주 관할

2. 관덕정

3. 제주목관아지

4. 제주읍성

본문내용

관아가 존속했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대문이다.
기간지주는 기를 달아두는 기구인 기간을 받치는 기둥이다. 이 기간지주는 제주목 방어사의 황수기(黃帥旗)를 게양하는 깃대의 받침기둥이었다.
중대문은 동헌으로 통하는 외대문과 내대문의 중간에 있었던 대문이다.
복원되지 않은 건물들로는 망경루 등이 있는데, 망경루는 서울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으로 목민보다는 중앙 정계로의 복귀를 바랬던 제주 목사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던 가장 큰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4. 제주읍성
제주읍성은 지방기념물 제 3호로 지정된 제주읍성은 탐라국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그 연대는 기록상으로 확실하지 않다. 1411년(태종 11)제주읍성을 보수했을 때 성의 둘레가 4,700척, 높이 1척이었으나 1512년(중종 7) 증축으로 둘레 5,489척 높이 11척이 되었다. 이후에도 성안에 물이 없고, 가락천과 산저천(산짓물)의 범람으로 인해 여러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뤄졌다.
1565년(명종 20) 곽흘목사가 식수난과 변란 때의 물난리에 대비하여 동쪽성을 산지내 밖으로 물려 쌓고 동-서에 각 1문, 남쪽에는 2문을 내었다. 또한 1599(선조 32)성윤문 목사가 성굽을 5자 더 늘려쌓고 남문을 없애는 동시에 문마다 초루를 만들고 남북의 두 수구(水口)에는 부지개 모양으로 남수각과 북수각을 설치하였다. 이후 1780년(정조 4)에는 김영수 목사가 산저천의 범람으로 인가가 잠겨 부서지자 예성터를 따라 길이 551보(步) 높이 9척인 간성(間城)을 쌓아 그 폐해를 막았다.
현재는 오현단 남쪽에 상지 일부가 복원돼 있을 뿐이다.
  • 가격1,000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05.03.27
  • 저작시기2005.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027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