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격하는 수나라를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패하였다. 문덕이 수나라에게 군사를 데려가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거짓 항복을 하고 이를 믿고 돌아가던 수나라 군대를 살수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44. 을파소
왕의 외척 좌가려 등이 외척으로 권세를 휘둘러 나라를 어지럽히니 왕이 어질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라 하였다. 이에 안류가 을파소를 천거하여 국상이 되었다. 을파소가 어질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니 왕이 안류가 을파소를 천거한 공이 크다 여겨 안류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45. 이사부
이사부는 가야국을 취하고 우산국을 병합하려 할 때에 나무사자를 만들어 거짓으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놓겠다고 하여 승리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서 서로 전쟁으로 피로한 틈을 타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46. 장보고, 정년
장보고와 정년은 어릴 적 친구로 서로 무예가 뛰어났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을 지내고 귀국하여 청해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왕께 청하였다. 후에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파는 이가 없었다. 한편 년은 굶주림에 떨다 장보고에게 찾아갔다. 마침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자 장보고가 정년에게 함께 할 것을 청하였다. 후에 왕이 장보고를 재상으로 삼고 정년에게 청해진을 맡기었다.
47. 죽죽
죽죽이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밑에서 보좌역을 할 때에 백제 윤충이 침략하였다. 서천이 윤충에게 휴전을 제의하고 백제가 이를 승낙하여 품석이 성을 내려가려하자 죽죽이 이를 말렸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군사를 먼저 보내자 백제가 신하를 모두 죽였다. 이 말을 들은 품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죽죽은 자신의 이름처럼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48. 창조리
창조리는 고구려 사람으로 모용외가 자주 침범하자 왕께 고노자를 천거하여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자 다시는 쳐들어오지 않았다. 왕이 궁궐을 신축하느라 백성의 고통이 늘자 창조리가 왕께 충고를 하였으나 왕이 반성하지 않았다. 이에 왕을 폐위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49. 최승우
당나라에 유학하여 급제하였으며 그가 지은 사륙문이란 책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지어 호본집이라 하였다. 후에 견훤을 위해 격문을 지어 태조에게 보냈다.
50. 최언위
18세에 당나라에서 유학하다 42세에 귀국하여 한림원 태학사 평장사를 지냈으며 죽은 후에는 문영이란 시호를 내렸다.
51. 최치원
치원이 12세 때 당에 유학하여 종사관 서기로 지내다 28세에 귀국하여 여러 지방의 태수로 지내다가 사신으로 다시 당에 갔다. 치원은 나라가 혼란하고 걸핏하면 죄를 뒤집어쓰는 등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조용히 살다 늙어 죽었다.
52. 취도
취도에게는 부과라는 형과 핍실이라는 동생이 둘 있었다. 취도의 이름은 도옥이었는데 나라를 위해 승의를 벗고 군인이 되어 이름을 취도라 고쳤다. 그리곤 전쟁에 나가 전사하였다. 후에 동생 핍실도 전쟁에 나아가 전사하자 왕이 이 삼형제에게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53. 필부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자 고구려가 칠중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필부가 대항하자 고구려가 철수하고자 하였다. 이때 비삽이 적군과 내통하여 군대가 위태로우니 지금이 기회라 하였다. 이 말에 고구려가 다시 공격하자 필부가 비삽을 죽이고 혼신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54. 해론
그의 아버지 찬덕이 백제와 싸우다 분통하여 느티나무에 부딪혀 죽었다. 후에 해론이 다시 백제와 싸울 때,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에 싸우다 죽었다. 이에 왕이 슬퍼하며 장가를 지어 조문했다.
55. 향덕
흉년에 백성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돌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살을 아버지에게 주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치료하였다. 이에 왕은 향덕에게 조 300섬 등을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하니 사람들은 그 곳을 효가리라 부른다.
56. 헌성
활쏘기 대회에서 헌성이 무후에게 중국인이 뽑히지 않아 염려하자 무후가 그 뜻을 받아들였다. 내준신이 헌성에게 반역을 도모한다는 누명을 씌워 죽였다. 후에 무후가 그 억울함을 알고 다시 장사를 치러주었다.
57. 효녀지은
홀로 어머니를 모시던 지은은 남의 집 종일을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를 안 어머니가 통곡하자 이 소리를 들은 효종랑이 이를 도와 곡식을 주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왕이 곡식과 집을 주었다. 이에 효종이 그에게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58. 흑치상지
나당연합군에 반격하여 싸우다가 당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웠으나 주흥의 모함에 억울하게 옥사하였다.
44. 을파소
왕의 외척 좌가려 등이 외척으로 권세를 휘둘러 나라를 어지럽히니 왕이 어질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라 하였다. 이에 안류가 을파소를 천거하여 국상이 되었다. 을파소가 어질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니 왕이 안류가 을파소를 천거한 공이 크다 여겨 안류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45. 이사부
이사부는 가야국을 취하고 우산국을 병합하려 할 때에 나무사자를 만들어 거짓으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놓겠다고 하여 승리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서 서로 전쟁으로 피로한 틈을 타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46. 장보고, 정년
장보고와 정년은 어릴 적 친구로 서로 무예가 뛰어났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을 지내고 귀국하여 청해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왕께 청하였다. 후에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파는 이가 없었다. 한편 년은 굶주림에 떨다 장보고에게 찾아갔다. 마침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자 장보고가 정년에게 함께 할 것을 청하였다. 후에 왕이 장보고를 재상으로 삼고 정년에게 청해진을 맡기었다.
47. 죽죽
죽죽이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밑에서 보좌역을 할 때에 백제 윤충이 침략하였다. 서천이 윤충에게 휴전을 제의하고 백제가 이를 승낙하여 품석이 성을 내려가려하자 죽죽이 이를 말렸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군사를 먼저 보내자 백제가 신하를 모두 죽였다. 이 말을 들은 품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죽죽은 자신의 이름처럼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48. 창조리
창조리는 고구려 사람으로 모용외가 자주 침범하자 왕께 고노자를 천거하여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자 다시는 쳐들어오지 않았다. 왕이 궁궐을 신축하느라 백성의 고통이 늘자 창조리가 왕께 충고를 하였으나 왕이 반성하지 않았다. 이에 왕을 폐위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49. 최승우
당나라에 유학하여 급제하였으며 그가 지은 사륙문이란 책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지어 호본집이라 하였다. 후에 견훤을 위해 격문을 지어 태조에게 보냈다.
50. 최언위
18세에 당나라에서 유학하다 42세에 귀국하여 한림원 태학사 평장사를 지냈으며 죽은 후에는 문영이란 시호를 내렸다.
51. 최치원
치원이 12세 때 당에 유학하여 종사관 서기로 지내다 28세에 귀국하여 여러 지방의 태수로 지내다가 사신으로 다시 당에 갔다. 치원은 나라가 혼란하고 걸핏하면 죄를 뒤집어쓰는 등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조용히 살다 늙어 죽었다.
52. 취도
취도에게는 부과라는 형과 핍실이라는 동생이 둘 있었다. 취도의 이름은 도옥이었는데 나라를 위해 승의를 벗고 군인이 되어 이름을 취도라 고쳤다. 그리곤 전쟁에 나가 전사하였다. 후에 동생 핍실도 전쟁에 나아가 전사하자 왕이 이 삼형제에게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53. 필부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자 고구려가 칠중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필부가 대항하자 고구려가 철수하고자 하였다. 이때 비삽이 적군과 내통하여 군대가 위태로우니 지금이 기회라 하였다. 이 말에 고구려가 다시 공격하자 필부가 비삽을 죽이고 혼신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54. 해론
그의 아버지 찬덕이 백제와 싸우다 분통하여 느티나무에 부딪혀 죽었다. 후에 해론이 다시 백제와 싸울 때,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에 싸우다 죽었다. 이에 왕이 슬퍼하며 장가를 지어 조문했다.
55. 향덕
흉년에 백성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돌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살을 아버지에게 주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치료하였다. 이에 왕은 향덕에게 조 300섬 등을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하니 사람들은 그 곳을 효가리라 부른다.
56. 헌성
활쏘기 대회에서 헌성이 무후에게 중국인이 뽑히지 않아 염려하자 무후가 그 뜻을 받아들였다. 내준신이 헌성에게 반역을 도모한다는 누명을 씌워 죽였다. 후에 무후가 그 억울함을 알고 다시 장사를 치러주었다.
57. 효녀지은
홀로 어머니를 모시던 지은은 남의 집 종일을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를 안 어머니가 통곡하자 이 소리를 들은 효종랑이 이를 도와 곡식을 주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왕이 곡식과 집을 주었다. 이에 효종이 그에게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58. 흑치상지
나당연합군에 반격하여 싸우다가 당나라에 들어가 공을 세웠으나 주흥의 모함에 억울하게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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