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포항시의 지명유래
2. 포항지역 설화
2. 포항지역 설화
본문내용
심하게 보채는 어린 손자를 업고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무리 달래도 손자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마침 앞에 나타난 구렁이를 가리키며 "저 구렁일 봐라. 그만 그치지 않으면 저 구렁이가 너를 잡아 먹을 거다." 하고 겁을 주었다. 그러자 손자는 울음을 뚝 그치더니 "할머니! 저건 용이야, 용." 왕자는 하루종일 기다린 그 용이라는 말을 듣자, 꿈틀꿈틀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몸에 힘이 일더니 공중으로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산의 맨꼭대기를 힘껏 쳤다. 산은 두 동강으로 갈라지고 그 틈으로 강물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 경주에는 홍수가 없었으며 형산강은 오늘날까지 경북 최대 도시인 포항을 이루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 때 떨어져 나간 산은 우리 나라의 호랑이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장기곶을 이뤘다고 하며 9일날 용이 꼬리를 쳐서 산이 날아와 만들어진 땅이라 하여 구룡포라고 부른다는 말도 있다.
전해 오는 곳 : 연일읍 증명리
8) 효자동
효자동은 원래 형산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어귀에 자리하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한 지역이었다. 250여년 전, 이곳은 30여 호의 작은 마을이 있었으며 전희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전희는 본관이 연안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의 나이 아홉살 때 아버지가 중병을 얻어 생명이 위독하게 되자 자신의 신체를 손상하는 등의 정성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3일이나 연장시킬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전희를 효성이 지극한 아이라고 칭찬하였으나 전희는 오히려 자신의 정성과 효성이 부족하여 아버지를 살리지 못했다고 죄스러워 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전희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아침 저녁 슬픈 곡으로 예를 올렸다.
그의 효심에 하늘도 감탄하여 밤마다 큰 범이 와서 움막을 지키다 날이 밝으면 어디론지 사라졌다고 한다. 이 일은 마을에 알려졌고 마침내 연일 현감이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이런 일이 있자 사람들은 전희를 하늘이 낸 효자라고 말하며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포항시 효자동은 전희의 아름다운 이야기서 비롯된 이름이라 한다.
전해 오는 곳 : 남구 효자동 407
9) 연오랑 세오녀
신라 8대 임금 아달라(阿達羅) 왕 때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 위에 홀연히 바위 하나가 나타나자, 연오랑은 이것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바위를 타고 온 이 사람을 왕으로 모셨다. 한편 아내인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궁금하여 바다에 나가 보았다.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자기도 그 바위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세오녀도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신라땅을 떠난 뒤부터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은 천문을 맡은 신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 신하는 "해와 달의 정(精)이 우리 나라에 있다가 이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연오랑 부부를 귀국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오랑은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홀홀히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가 짠, 가는 명주를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하면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오." 라고 말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그 비단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제사했더니 과연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명주를 국보로 모시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고 하였다.
이 때 떨어져 나간 산은 우리 나라의 호랑이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장기곶을 이뤘다고 하며 9일날 용이 꼬리를 쳐서 산이 날아와 만들어진 땅이라 하여 구룡포라고 부른다는 말도 있다.
전해 오는 곳 : 연일읍 증명리
8) 효자동
효자동은 원래 형산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어귀에 자리하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한 지역이었다. 250여년 전, 이곳은 30여 호의 작은 마을이 있었으며 전희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전희는 본관이 연안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의 나이 아홉살 때 아버지가 중병을 얻어 생명이 위독하게 되자 자신의 신체를 손상하는 등의 정성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3일이나 연장시킬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전희를 효성이 지극한 아이라고 칭찬하였으나 전희는 오히려 자신의 정성과 효성이 부족하여 아버지를 살리지 못했다고 죄스러워 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전희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아침 저녁 슬픈 곡으로 예를 올렸다.
그의 효심에 하늘도 감탄하여 밤마다 큰 범이 와서 움막을 지키다 날이 밝으면 어디론지 사라졌다고 한다. 이 일은 마을에 알려졌고 마침내 연일 현감이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이런 일이 있자 사람들은 전희를 하늘이 낸 효자라고 말하며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포항시 효자동은 전희의 아름다운 이야기서 비롯된 이름이라 한다.
전해 오는 곳 : 남구 효자동 407
9) 연오랑 세오녀
신라 8대 임금 아달라(阿達羅) 왕 때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 위에 홀연히 바위 하나가 나타나자, 연오랑은 이것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바위를 타고 온 이 사람을 왕으로 모셨다. 한편 아내인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궁금하여 바다에 나가 보았다.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자기도 그 바위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세오녀도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신라땅을 떠난 뒤부터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은 천문을 맡은 신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 신하는 "해와 달의 정(精)이 우리 나라에 있다가 이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연오랑 부부를 귀국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오랑은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홀홀히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가 짠, 가는 명주를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하면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오." 라고 말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그 비단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제사했더니 과연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명주를 국보로 모시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고 하였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