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현진건의 생애
3. 연구사 검토
3. 사회적 배경
4.1
4.2 속악한 사회 현실과 지식인의 좌절-「술 권하는 사회」
5. 「운수 좋은 날」
Ⅰ.반어의 구조를 통해 보는 사회
Ⅱ.인물을 통해서 보는 사회-인력거꾼 김첨지
Ⅲ.소재를 통해서 보는 사회-돈, 설렁탕, 술
문학적 특징
2. 현진건의 생애
3. 연구사 검토
3. 사회적 배경
4.1
4.2 속악한 사회 현실과 지식인의 좌절-「술 권하는 사회」
5. 「운수 좋은 날」
Ⅰ.반어의 구조를 통해 보는 사회
Ⅱ.인물을 통해서 보는 사회-인력거꾼 김첨지
Ⅲ.소재를 통해서 보는 사회-돈, 설렁탕, 술
문학적 특징
본문내용
의 위치라든가 개성의 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탐구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인식은 사회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절망하여 일탈하는 경우로 나타나기도 한다.
1920년대 초반에 나타났던 '백조'파의 문학 등은 그 사회의 주도적인 흐름과 조화되지 못하는 개인들의 자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때로 그러한 양상은 도피적이고 퇴폐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 시대에 들어 비로소 시작된 개성의 자각과 사회와의 부조화에서 비롯되는 절망감을 반영한 것이다. 만약 당대 사회 속에서 개인의 역할이라든가 개성에 대한 자의식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런 식의 괴리마저도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의 이런 경향의 문학에서 우리는 3·1 운동 이후 가속화되기 시작한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발견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현진건을 비롯한 염상섭·나도향에 의해 당대 식민지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살아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새롭게 각성해가는 지식인들의 지향과 그것이 현실사회와의 관계에서 빚어낼 수밖에 없는 괴리를 반영하였다.
1880년 경부터 해외유람단과 유학생들이 많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외래문화를 수입·수용한 계층을 형성하였고, 일제 강점 후에도 식민지 관료가 되어 사회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되며, 그들 중 일부는 실질적인 계층 상승을 도모하게 된다. 이러한 관비 관료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개화 이후 외래문화 수용을 통한 강력한 개화의지를 갖고 있었던 계층은 조선조 후기부터 사회구조의 모순을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현실에 참여 기회가 없던 중인계층이거나 경제적으로 능력있는 이속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외래문화에 대한 접촉의 기회가 많았음은 물론 국제정세나 사회변동에 대하여 예민한 관심을 갖고 있다가, 20세기 전후 정치적·사회적 변동기에 처하여 능력있는 자식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변혁기가 계층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시대 역계층화 현상은 이미 후기부터 태동되다가 갑오개혁으로 문벌과 양반 등의 계급이 타파되고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가 등용됨에 따라, 능력과 교육 정도에 의해 계급 질서가 형성되게 되었으며, 신교육을 받은 자들이 대거 관료계층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근대화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분화되고, 그로 인해 학교교육을 받은 근대문화 수용계층들이 그 역할을 분담하게 됨에 따라 더 많이 충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인식했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육을 통한 신분 해체 변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 강점 이후 식민정책 수행을 위하여 근대교육을 받은 계층들을 식민지 관료로 이용하기에 이르면서, 근대 지향적 인물들이 식민지 현실을 수용하게 되는 비운과 갈등을 겪게 된다.
이들 작품은 이러한 시대에, 사회적 상승을 도모하려는 인물들의 사회에 대한 갈등을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갈등은 사회체제에 대한 부적응에서 빚어진 개인적 문제에 보다 많은 원인이 있는 것이다. 즉 식민지 사회체제에 수용당할 수도 없고, 사회적 상승욕구가 좌절되는 데 따른 사회에 대한 소외감을 술이나 성을 통해 극복하려 하나 실패하여 결국 일탈 지경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그들을 수용하지 않는 현실에 대처할 만한 가치가 정립되어 있지 않을 때, 정신적 황폐감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세계인식의 편협성에서 빚어진 현상은 다음 단계에서 비로소 극복하게 된다.
한 시대의 지식인은 직접적으로 그 사회의 정치적 지배자가 되려 함으로써, 또는 간접적으로 그 사회의 양심과 결단의 방향을 설정해 줌으로써 정치 권력에 대한 일종의 포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당시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그러한 포부는 보다 강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지식인들은 그러한 포부를 펴지 못하여 사회와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은 극심해져서 좌절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좌절은 근대사회와 식민지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더 중요한 것은 작중인물들 자신이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대응양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느 시기에도 지식인들은 당시대의 지배 문화와 일정한 거리를 취하면서 문화의 상부구조로부터 소외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자이면서, 사회지배문화를 극복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진 진취적이고 힘있는 세력들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에 나타난 인물들의 현실 대응 태도는, 모순된 사회를 극복하려는 지적이고 창조적인 자세가 아니라, 사회와 화합되어 수용당함으로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는 개인적이고 반지성적인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에 적응함으로써만 개인적인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식민지 정치상황 때문이고, 둘째는 새로 대두된 근대사회체제와 조화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전근대적 의식 때문이다. 근대사회체제와 그들의 의식속에 남아 있는 봉건적인 요소,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의식은 항상 충돌을 일으키며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소설이나 「무정」에 나타난 지식인 계층들의 진취적인 모습이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은, 그들을 수용할 수 없는 사회구조에 일차적인 이유가 있다. 일제는 식민통치 수단으로 전통적인 양반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는 인사 정책을 씀으로 해서 새로운 계층 형성의 잠재적 세력인 지식계층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정책으로 한말 지배계급이었던 양반 관료층이 그대로 보호되었으며, 지방행정직에만 친일적 인사가 임명되었다. 그 결과 일본 식민 통치자들은 한말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전통적 관료 지배계급과 대지주, 상공업 자본가 등과 함께 일종의 공생적 협동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말에 권력을 가지고 행정직에 종사하였던 사람들 중에 개화지향적 인물들이 일제 치하에서도 일본 귀족으로 여전히 사회 상층부를 형성하게 되고, 대다수 자본가들이 일제의 수혜계층으로 여전히 남아 있게 됨에 따라, 새 시디에 계층 상승을 시도하였던 인물들은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지위 상승을 획득할 수 없게 되었다.
1920년대 초반에 나타났던 '백조'파의 문학 등은 그 사회의 주도적인 흐름과 조화되지 못하는 개인들의 자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때로 그러한 양상은 도피적이고 퇴폐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 시대에 들어 비로소 시작된 개성의 자각과 사회와의 부조화에서 비롯되는 절망감을 반영한 것이다. 만약 당대 사회 속에서 개인의 역할이라든가 개성에 대한 자의식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런 식의 괴리마저도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의 이런 경향의 문학에서 우리는 3·1 운동 이후 가속화되기 시작한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발견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현진건을 비롯한 염상섭·나도향에 의해 당대 식민지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살아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새롭게 각성해가는 지식인들의 지향과 그것이 현실사회와의 관계에서 빚어낼 수밖에 없는 괴리를 반영하였다.
1880년 경부터 해외유람단과 유학생들이 많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외래문화를 수입·수용한 계층을 형성하였고, 일제 강점 후에도 식민지 관료가 되어 사회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되며, 그들 중 일부는 실질적인 계층 상승을 도모하게 된다. 이러한 관비 관료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개화 이후 외래문화 수용을 통한 강력한 개화의지를 갖고 있었던 계층은 조선조 후기부터 사회구조의 모순을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현실에 참여 기회가 없던 중인계층이거나 경제적으로 능력있는 이속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외래문화에 대한 접촉의 기회가 많았음은 물론 국제정세나 사회변동에 대하여 예민한 관심을 갖고 있다가, 20세기 전후 정치적·사회적 변동기에 처하여 능력있는 자식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변혁기가 계층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시대 역계층화 현상은 이미 후기부터 태동되다가 갑오개혁으로 문벌과 양반 등의 계급이 타파되고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가 등용됨에 따라, 능력과 교육 정도에 의해 계급 질서가 형성되게 되었으며, 신교육을 받은 자들이 대거 관료계층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근대화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분화되고, 그로 인해 학교교육을 받은 근대문화 수용계층들이 그 역할을 분담하게 됨에 따라 더 많이 충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인식했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육을 통한 신분 해체 변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 강점 이후 식민정책 수행을 위하여 근대교육을 받은 계층들을 식민지 관료로 이용하기에 이르면서, 근대 지향적 인물들이 식민지 현실을 수용하게 되는 비운과 갈등을 겪게 된다.
이들 작품은 이러한 시대에, 사회적 상승을 도모하려는 인물들의 사회에 대한 갈등을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갈등은 사회체제에 대한 부적응에서 빚어진 개인적 문제에 보다 많은 원인이 있는 것이다. 즉 식민지 사회체제에 수용당할 수도 없고, 사회적 상승욕구가 좌절되는 데 따른 사회에 대한 소외감을 술이나 성을 통해 극복하려 하나 실패하여 결국 일탈 지경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그들을 수용하지 않는 현실에 대처할 만한 가치가 정립되어 있지 않을 때, 정신적 황폐감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세계인식의 편협성에서 빚어진 현상은 다음 단계에서 비로소 극복하게 된다.
한 시대의 지식인은 직접적으로 그 사회의 정치적 지배자가 되려 함으로써, 또는 간접적으로 그 사회의 양심과 결단의 방향을 설정해 줌으로써 정치 권력에 대한 일종의 포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당시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그러한 포부는 보다 강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지식인들은 그러한 포부를 펴지 못하여 사회와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은 극심해져서 좌절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좌절은 근대사회와 식민지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더 중요한 것은 작중인물들 자신이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대응양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느 시기에도 지식인들은 당시대의 지배 문화와 일정한 거리를 취하면서 문화의 상부구조로부터 소외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자이면서, 사회지배문화를 극복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진 진취적이고 힘있는 세력들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에 나타난 인물들의 현실 대응 태도는, 모순된 사회를 극복하려는 지적이고 창조적인 자세가 아니라, 사회와 화합되어 수용당함으로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는 개인적이고 반지성적인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에 적응함으로써만 개인적인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식민지 정치상황 때문이고, 둘째는 새로 대두된 근대사회체제와 조화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전근대적 의식 때문이다. 근대사회체제와 그들의 의식속에 남아 있는 봉건적인 요소,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의식은 항상 충돌을 일으키며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소설이나 「무정」에 나타난 지식인 계층들의 진취적인 모습이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은, 그들을 수용할 수 없는 사회구조에 일차적인 이유가 있다. 일제는 식민통치 수단으로 전통적인 양반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는 인사 정책을 씀으로 해서 새로운 계층 형성의 잠재적 세력인 지식계층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정책으로 한말 지배계급이었던 양반 관료층이 그대로 보호되었으며, 지방행정직에만 친일적 인사가 임명되었다. 그 결과 일본 식민 통치자들은 한말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전통적 관료 지배계급과 대지주, 상공업 자본가 등과 함께 일종의 공생적 협동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말에 권력을 가지고 행정직에 종사하였던 사람들 중에 개화지향적 인물들이 일제 치하에서도 일본 귀족으로 여전히 사회 상층부를 형성하게 되고, 대다수 자본가들이 일제의 수혜계층으로 여전히 남아 있게 됨에 따라, 새 시디에 계층 상승을 시도하였던 인물들은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지위 상승을 획득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