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쉽의 종류, 특징 및 역사상 뛰어난 리더쉽을 소유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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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1. 리더쉽이란
`영도력이란 수영과 같아 책으로 배울수 없다.`
--- 헨리 민츠버그---
(1)리더십의 유형
(2)리더십 유형의 특징
(3)리더십 유형의 장·단점
2. 역사상 리더쉽을 가진 리더에 대한 조사
(1)조사내용
(2)조사결과
(3)이유

Ⅱ.본론
1. 체 게바라
2. 등소평
2. 잔다르크

Ⅲ.결론

본문내용

종적 강화(講和)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귀족(封建貴族)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常備軍)을 강화하며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추진해 나갔다. 한편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 간에 걸친 장미전쟁(1455~1485)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생존 경쟁의 일환(一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헨리 7세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기초을 굳혀주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國民國家)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기술직이민(技術職移民)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 즉, 백년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해방(農民解放)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왕권의 확대 등을 초래하였다.
(2)잔다르크의 생애
1412년:1월 6일,프랑스 북부에 있는 돔레미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남
1425년(13살):성 미카엘로부터"국왕을 도와 프랑스를 구하라"라는 계시를 듣고 따를 것을 맹세함
1428년(16살):2월 23일,황태자가 있는 시농성에 당도함
1429년(17살)오를레앙의 적군을 무찌르고 랭스를 함락시킴
1430년(18살):콩페뉴에서 적의 계략에 빠져 포로로 잡힙
11월 21일,잔 다르크가 영국군에 팔려감
1431년(19살)
종교 재판을 받음 5월 29일,화형이 결정되어 다음 날 화형을 당함
1453년 백년 전쟁이 끝남
1456년 잔 다르크의 명예 회복 재판이 열림
1920년 5월 16일,로마 교황청이 잔 다르크를 성녀의 한 사람으로 받들고 그녀의 공적을 칭송함
-가톨릭의 성녀(聖女). 로렌과 샹파뉴 사이에 있는 동레미라퓌셀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1429년의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서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城)에 있는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방문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북반부를 영국군 및 영국에협력하는 부르고뉴파(派)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도 1420년의 트루아의 조약에 따라 샤를 6세 사후에는 영국왕 헨리 5세가, 또 그의 사후에는 그의아들 헨리 6세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어, 황태자 샤를은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잔 다르크는 샤를을 격려하고 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저항하고 있던 오를레앙 구원에 앞장서서 싸웠다. 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그해 5월 상순,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완전히 패퇴하였다.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에 샤를 7세는 영국의 헨리 6세에 앞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잔 다르크에 대한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잔 다르크는 더욱 충성을 하였다.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1431년,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 찍혀, 이단(異端)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판결을 파기(1456), 명예를 회복시켰고, 가톨릭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3)잔다르크의 리더쉽이 역사에 끼친 영향
잔다르크는 어린나이에 그다지 여권을 보자받지 못한 시대에서 계급도 없었고, 실제 지휘권을 가진 적도 없는 상태에서 많은 군사들을 지휘했고, 또 승리로 이끌었다.
잔 다르크의 출현 이후 프랑스가 승리하게 된 이유는 장기간에 걸친 영국군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시민과 농민들 사이에 반영감정(反英感情)이 고조된 점과, 샤를 7세에 의하여 보병 ·포병(砲兵)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國王軍)이 강화되었던 점등이 그 원인이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講和)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귀족(封建貴族)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常備軍)을 강화하며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國民國家)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기술직이민(技術職移民)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 즉, 백년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해방(農民解放)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왕권의 확대 등을 초래하였다.
Ⅲ.결론
①역사적 인물들이 리더쉽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시대나 사회적 배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②진정한 리더의 리더쉽이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역사적, 정치적 상황, 문화 등을 잘 이용하여 사람들을 이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료 출처는 :
1.체게바라 평전 : 장 코르미에 (2001.(주) 실천문학)
A Dictionary of Mordern Revolution : Edward Hyams(Taplinger Publishing Co. Inc)
2.잔다르크 : 헤르베르트 네테 (1998. 한길사)
3.두산 대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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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4.25
  • 저작시기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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