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뭉크의 생애
Ⅱ.뭉크이야기…
Ⅱ.뭉크이야기…
본문내용
사시에 인연이 맺어진다.’ 라고 하였습니다.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라는 존재는 여러 가지의 의미로 다가왔는데 특히 여자는 어머니 같은 포근한 존재, 그러나 동시네 남자위에 올라타 남자의 개성을 파괴하는 존재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뭉크에게 있어서 죽음 다음의 충격 때문에 가지게 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가는 시기부터 뭉크는 7년간을 독일에서 살면서 제작 활동을 펼쳤는데 뭉크의 열렬한 후원자 이자 친구인 막스 린더 박사와 알게 되었습니다.
뭉크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그 이유는 어린 시절 행복하지 못했던 가정의 단면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이 보헤미안적 사상에 빠져있었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뭉크의 인생에서 여자와 사랑에서도 또 한번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받게 되는데 부유한 상인의 딸 이였던 툴라 라이젠의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뭉크는 툴라와 자주 다툼을 하게 되어 1902년 자신과 결혼 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던 툴라를 말리다 툴라의 실수로 뭉크의 왼쪽 손가락 일부를 잃는 사건이 생기게 되고 그 후 뭉크의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습니다.
마라의 죽음 -1907년
총격 사건 이후 그 충격을 그림으로 나타내 것인데
피로 얼룩진 침대 앞에 똑바로 서 있는 암살자는 툴라 이고 죽은 남자는 뭉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이후 시작된 새로운 사랑에서도 실패한 후 뭉크는 정신적 충격으로 과도한 음주와 실의에 빠져 지냈다고 합니다.
영혼의 상처를 받은 우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뭉크는 절망과 피해의식으로 인한 환각 증상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피해망상증으로 인해 45세인 1908년 10월 다니엘 야콥슨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1여 년간의 요양 생활동안 뭉크는 정신과 적인 치료 보다는 자신의 작품 활동이 자신을 더 잘 치유한다고 믿었으며 회복이 되지 자신의 고향인 고국 노르웨이에 영원히 정착 하게 됩니다.
고향에 정착한 뭉크는 더 이상 남성을 파멸시키는 여성의 이미지도 불안과 공포에 떠는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묘사하지 않았고 수도승의 자세로서 은둔자의 생활을 자처하게 되는데
정신과 치료 후의 그의 작품은 변화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정신과 치료 전과 후의 자화상을 살펴보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특히 죽음에 대하여 공포와 불안을 느끼기 보다는 언젠가는 죽어야하는 삶에 대한 순서를 인정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평온한 모습 등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08년 이후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 이후 강렬한 색채화 그의 천재성은 사라진 듯이 보이고 더 이상 작품을 발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정신분열을 겪고 난 후의 뭉크의 생활은 고독하고 폐쇄적으로 변하게 되지만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외향적 시선으로, 세상을 보다 낙천적이고 보편적인 상징을 표현하기 위하여 밝은 색감을 사용하였고 자신의 문제보다는 사회집단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방향의 전환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신 병원에 입원한 동안 건강과 안정을 되찾기는 했으나 섬세하고 예민한 정신력은 다소 둔화되었고 그의 장년기부터 노년기는 평온하지만 너무 일찍 노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08년 이후 그의 작품과 자화상입니다.
저승에서-자화상 (1895년) 담배를 든 자화상(1895년)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1940년) 마지막 자화상(1943년)
귀가하는 노동자들 (1915년) 마을의 큰길 (1905년)
피요르드의 떠오르는 태양(1090-1914년)
수욕도 (1915년)
작품에서 보여 지듯이 지옥의 불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 어둡고 공포 스러웠던 생의 자화상은 말년에 가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평온한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자신과 죽음, 사랑으로만 나타났다 인상파적인 그림에서 거리의 노동자들, 떠오르는 태양 등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작품 내용으로 변화하였습니다.
1912년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 전람회에 뭉크는「병든 아이」「별이 빛나는 밤에」등을 초대 출품하였고 이어 여려 전시되어 초대작으로 출품되면서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높아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 속에서 1937년 독일의 나치스로부터 퇴폐미술로 낙인찍히고 그의 작품 82점이 장제로 압수되는 고초를 겪게 되지만 그가 어린 시절 겪어왔던 충격에 비하면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였고 세상의 요동에 흔들림 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1943년 크리스마스 때 근처에 있는 화약고 폭발사건으로 지하에 피해 있다가 독감에 걸려 지병인 기관지 카타르로 인해 사망했다는 설과 심장마비로 사망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화가이자 판화가 이기도 한 그는 유화 약 1,000점ㆍ판화 약 15,400점ㆍ수채화와 소묘 약 450점ㆍ조소 6점 등을 남긴 천재적이고도 노력하는 대 화가 였습니다.
뭉크의 삶에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홀로 두고 먼저 떠나버렸습니다. 어머니ㆍ누나 소피에ㆍ아버지ㆍ남동생 안드레이스ㆍ여동생 로이라ㆍ이모 카렌 등 모든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힘들어했고 마지막 뭉크의 동생들 역시 뭉크와 같이 아무도 결혼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뭉크의 막내 여동생이였던 잉게르 만이 뭉크의 곁에 남아 있었지만 뭉크가 죽은 후 관리하던 상당 분량의 유품들을 폐기 처분하였는데 그녀 역기 편집증과 정신 이상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 참고 문헌 ※
한국미술치료학회 미술치료의 이론과 실제 ,동아출판사 2000
한국미술치료학회 정신병리와 미술치료 , 동아출판사 2005
에드바르드 뭉크 뭉크뭉크(이충순 옮김) , 다빈치출판 2000
롤프 스테너센 에드바르드 뭉크(김윤혜 옮김) , 일광문화사 2003
토마스 M,머써 뭉크 작품집 ,중아일보사 1991
서승원 해설 서양의 미술16-뭉크편 , 서문당 1989
양치규 ‘Edvard Much 회화작품에 관한 연구’ , 중앙대학교 1985
이은수 “Edvard Much의 사랑연작에 관한 연구” , 성신여대
임영방 현대미술의 이해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주리애 미술치료는 마술치료 , 학지사 2001
박경래 뭉크 ,금성출판사 1980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가는 시기부터 뭉크는 7년간을 독일에서 살면서 제작 활동을 펼쳤는데 뭉크의 열렬한 후원자 이자 친구인 막스 린더 박사와 알게 되었습니다.
뭉크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그 이유는 어린 시절 행복하지 못했던 가정의 단면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이 보헤미안적 사상에 빠져있었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뭉크의 인생에서 여자와 사랑에서도 또 한번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받게 되는데 부유한 상인의 딸 이였던 툴라 라이젠의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뭉크는 툴라와 자주 다툼을 하게 되어 1902년 자신과 결혼 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던 툴라를 말리다 툴라의 실수로 뭉크의 왼쪽 손가락 일부를 잃는 사건이 생기게 되고 그 후 뭉크의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습니다.
마라의 죽음 -1907년
총격 사건 이후 그 충격을 그림으로 나타내 것인데
피로 얼룩진 침대 앞에 똑바로 서 있는 암살자는 툴라 이고 죽은 남자는 뭉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이후 시작된 새로운 사랑에서도 실패한 후 뭉크는 정신적 충격으로 과도한 음주와 실의에 빠져 지냈다고 합니다.
영혼의 상처를 받은 우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뭉크는 절망과 피해의식으로 인한 환각 증상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피해망상증으로 인해 45세인 1908년 10월 다니엘 야콥슨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1여 년간의 요양 생활동안 뭉크는 정신과 적인 치료 보다는 자신의 작품 활동이 자신을 더 잘 치유한다고 믿었으며 회복이 되지 자신의 고향인 고국 노르웨이에 영원히 정착 하게 됩니다.
고향에 정착한 뭉크는 더 이상 남성을 파멸시키는 여성의 이미지도 불안과 공포에 떠는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묘사하지 않았고 수도승의 자세로서 은둔자의 생활을 자처하게 되는데
정신과 치료 후의 그의 작품은 변화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정신과 치료 전과 후의 자화상을 살펴보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특히 죽음에 대하여 공포와 불안을 느끼기 보다는 언젠가는 죽어야하는 삶에 대한 순서를 인정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평온한 모습 등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08년 이후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 이후 강렬한 색채화 그의 천재성은 사라진 듯이 보이고 더 이상 작품을 발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정신분열을 겪고 난 후의 뭉크의 생활은 고독하고 폐쇄적으로 변하게 되지만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외향적 시선으로, 세상을 보다 낙천적이고 보편적인 상징을 표현하기 위하여 밝은 색감을 사용하였고 자신의 문제보다는 사회집단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방향의 전환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신 병원에 입원한 동안 건강과 안정을 되찾기는 했으나 섬세하고 예민한 정신력은 다소 둔화되었고 그의 장년기부터 노년기는 평온하지만 너무 일찍 노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08년 이후 그의 작품과 자화상입니다.
저승에서-자화상 (1895년) 담배를 든 자화상(1895년)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1940년) 마지막 자화상(1943년)
귀가하는 노동자들 (1915년) 마을의 큰길 (1905년)
피요르드의 떠오르는 태양(1090-1914년)
수욕도 (1915년)
작품에서 보여 지듯이 지옥의 불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 어둡고 공포 스러웠던 생의 자화상은 말년에 가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평온한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자신과 죽음, 사랑으로만 나타났다 인상파적인 그림에서 거리의 노동자들, 떠오르는 태양 등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작품 내용으로 변화하였습니다.
1912년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 전람회에 뭉크는「병든 아이」「별이 빛나는 밤에」등을 초대 출품하였고 이어 여려 전시되어 초대작으로 출품되면서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높아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 속에서 1937년 독일의 나치스로부터 퇴폐미술로 낙인찍히고 그의 작품 82점이 장제로 압수되는 고초를 겪게 되지만 그가 어린 시절 겪어왔던 충격에 비하면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였고 세상의 요동에 흔들림 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1943년 크리스마스 때 근처에 있는 화약고 폭발사건으로 지하에 피해 있다가 독감에 걸려 지병인 기관지 카타르로 인해 사망했다는 설과 심장마비로 사망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화가이자 판화가 이기도 한 그는 유화 약 1,000점ㆍ판화 약 15,400점ㆍ수채화와 소묘 약 450점ㆍ조소 6점 등을 남긴 천재적이고도 노력하는 대 화가 였습니다.
뭉크의 삶에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홀로 두고 먼저 떠나버렸습니다. 어머니ㆍ누나 소피에ㆍ아버지ㆍ남동생 안드레이스ㆍ여동생 로이라ㆍ이모 카렌 등 모든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힘들어했고 마지막 뭉크의 동생들 역시 뭉크와 같이 아무도 결혼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뭉크의 막내 여동생이였던 잉게르 만이 뭉크의 곁에 남아 있었지만 뭉크가 죽은 후 관리하던 상당 분량의 유품들을 폐기 처분하였는데 그녀 역기 편집증과 정신 이상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 참고 문헌 ※
한국미술치료학회 미술치료의 이론과 실제 ,동아출판사 2000
한국미술치료학회 정신병리와 미술치료 , 동아출판사 2005
에드바르드 뭉크 뭉크뭉크(이충순 옮김) , 다빈치출판 2000
롤프 스테너센 에드바르드 뭉크(김윤혜 옮김) , 일광문화사 2003
토마스 M,머써 뭉크 작품집 ,중아일보사 1991
서승원 해설 서양의 미술16-뭉크편 , 서문당 1989
양치규 ‘Edvard Much 회화작품에 관한 연구’ , 중앙대학교 1985
이은수 “Edvard Much의 사랑연작에 관한 연구” , 성신여대
임영방 현대미술의 이해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주리애 미술치료는 마술치료 , 학지사 2001
박경래 뭉크 ,금성출판사 1980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