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금석문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1) 영일 냉수리 신라비
2) 울진 봉평 신라비
3) 울주 천전리 각석
4) 진흥왕 순수비
5) 단양 적성비
6) 남산 신성비
7) 6세기 신라 금석문의 특징
3.결론

본문내용

기 신라에서 대부분 공적인, 그것도 국가적인 사적비만 작성되었다는 것은 금석문의 시대적인 사정을 여실히 반영하는 사실이다. 당시는 공동체적인 결속력이 전반적으로 강하게 남아 있었던 탓에 개인의 위상을 나타내는 묘비나 묘지가 제작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반면 국가의 공적인 사적비가 널리 작성된 것은 율령의 반포를 비롯하여 영역의 확장에 따른 율령의 전반적인 확대 시행 및 이와 관련한 새로운 시기의 도래와 관계가 깊다. 단지 일시적 일회적인 용도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면 제작에 여러 가지로 큰 어려움이 뒤따랐을 석문을 애써 작성하였을리 만무하다. 따라서 굳이 석문을 작성하려 하였던 것은 항구성을 바란 특정한 의도가 개재되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요컨대 6세기에 신라가 많은 사적을 담은 비문을 만든 목적은 새로운 율령적인 지배체제로 전환하면서 그 강력한 시행의지와 율령을 확산시키는 데 있었다.
또한 불교가 수용, 정착되어가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된 금석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는 그만큼 불교적인 인식으로 분식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중고기 금석문은 그야말로 순수성 그 자체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문식의 문장만이 아니라 이두가 포함된 문장, 신라식 한문으로 표현된 것 등 다양하다. 한편 그러한 움직임 속에는 신라식의 한자를 만들어 쓰거나 특정한 서체 문자를 사용하려 한 시도도 보인다. 이는 당시 문자 사용이 확대되면서 그와 함께 나름의 체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의 산물로 추정된다.
한편 연대 표기에서는 어떤 정형성이 찾아지지 않는다. 이는 아직 문서 작성상 연월일을 나타내는 획일화된 어떤 원칙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 다음 비문의 내용 중 본문인 사적을 기록한 부분의 분량보다 인명을 열거한 분량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이 특기되어야 한다. 이는 공동체적인 의식 속에서도 개인이 점차 중시되어 가고 있는 현상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중고기에만 보이는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런데 중고기에는 인명을 표기하는 데는 어떤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것이 중고기 금석문임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도 된다.
Ⅲ. 결론
이상에서 언급한 금석문 외에도 대구 무술 오작비, 영천 청제비, 명활산성작성비, 안압지 출토 토기, 이성산성 출토 목간, 성산산성 출토 목간 등 많은 금석문 자료들이 당시 시대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6세기 신라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금석문 사료 외에는 마땅히 다른 것을 찾기 어렵다. 이는 당대에 작성된 자료가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잘 남겨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옛 문서들은 대체로 종이 등에 작성되므로 그 성질상 현재까지 남아 있기 어렵다. 때문에 특히 현대와 시간의 틈이 많이 벌어진 고대사 분야에서는 문서로 남아있는 사료를 찾기 매우 힘든 실정이다. 하지만 금석문은 말 그대로 금속과 단단한 돌에 새겨진 것이다. 상대적으로 보존성이 좋은 이러한 금석문이 많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금석문은 1차 사료로서 그 뒤에 이를 토대로 편집되거나 재정리된 2, 3차 사료들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2, 3차 사료에는 후대의 인식이 스며들어 실상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쉽게 윤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석문은 특정한 인식과 목적 아래에서 과장, 윤색되지 않아 적어도 거기에 담겨진 내용에 대해서는 사료 비판의 과정을 따로 거치지 않고도 자유롭게 역사 복원에 활용할 수 있다. 김부식이나 일연과 같은 후대인들이 특정한 눈으로 바라본 고대사상을 완전히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고대사이 실상을 제대로 그려내려면 일단 당시인들의 안목으로 되돌아가 당대 모습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그를 오늘의 입장에서 새롭게 읽어내야 한다. 그러한 까닭으로 한국 고대사에서의 금석문은 다른 시기의 그것 보다 각별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금석문에 보이는 사실들은 단편적이며 또한 특수한 사례들일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당대 사료라 하더라도 이를 일반화하는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자료가 빈약하다고 해서 특수한 구체적인 사례를 무조건 일반화 시키는 것은 또 다른 오류로서 일종의 왜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 고대사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금석문을 신중하고 선입견을 배제한 객관적인 태도로 연구하여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한국 고대사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
신라 중고기 금석문 연구
금석문과 신라사
고대로부터의 통신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5.06.02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996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