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의 생활 - 의, 식, 주 등...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수메르
스파르타
이집트
로마

3.결론

본문내용

다. 행렬 선두에는 다섯 명의 횃불 든 앞잡이들이 서서 길을 열고, 그 뒤를 피리 연주자들이 따라간다. 길을 걸으며 이들은 아주 신나고 경쾌한 노래를 부른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행렬단은 아이들을 부르며 호두알들을 공중으로 던진다. 이 호두들은 신부의 유년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것으로, 호두가 길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는 유쾌한 울림 소리는 미래에 신부가 다산하며 행복 하라는 축복의 메시지라는 식이다. 신랑의 친구 세 명이 먼저 앞서가는데, 우리가 보통 제 1들러리라 부르는 '프로누부스(pronubus)'가 맨 앞에 서서 산사나무를 아주 촘촘하게 엮어 만든 결혼 횃불을 흔들며 간다. 그 뒤를 따르는 두 명의 친구는 신부를 잡고 안은 다음 팔로 들어올려 발이 땅에 닿지 않게 하면서 신혼방의 문지방을 넘게 한다. 신혼 방은 하얀 벽걸이 천과 막 돋아난 푸릇푸릇한 잎들로 꾸며져 있다. 신부의 친구 세 명이 신부를 뒤따라 들어가는데, 그 중 두 명 가운데 먼저 한 명은 물레 씨아를 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물레 방추를 들고 있다. 이 두 물건은 여자로서의 미덕과 집안 일을 상징한다. 신랑이 신부에게 물과 불을 건네면, 세 번째 친구, 바로 신부의 제 1들러리인 '프로누바(pronuba)'가 신부를 신혼 침대까지 안내한다.
☆ 로마인의 이혼
세기 초 도시 로마의 '쿰 마누' 결혼에서는 남편의 권위 아래 있던 여자들인지라 여자들에 의한 일방적인 이혼은 절대 불가능했다. 반면 남편에 의한 일방적 이혼은 남자가 여자에 대한 우위권을 지니고 있는 이상 가능했다. 여자에게 과오가 있을 경우 일방적인 이혼조치가 취해졌고 남편 가족들이 내린 합의 결정에 따라 여자는 어떤 응당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12석판에도 이런 최종결정이 나오면 남편을 여자에게서 집 열쇠를 요구할 수 있었고, 부인은 여지없이 여주인으로서의 권한을 박탈당했다.
공화국 말기에 남자들은 그들이 결정해서 한 결혼을 마음대로 취소해도 되는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시네 마누'의 결혼인 경우에는 여자가 동의를 해 주어야만 가능했다. 만일 여자가 부권 내지 부계 친족들의 권한 아래 있는 경우, 둘의 관계를 깨기 위해 남편은 말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면 된다. 만일 여자가 부모 친지가 없는 경우라면 이때는 본인의 판단에 따라야 하는데, 관계를 깰 것인지 말 것인지 여자가 의사를 밝혀야 한다. 키케로의 시대에 와서는 둘의 합의에 따른 것이든 한 사람의 의지에 따른 것이든 이혼은 가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 흔한 일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결혼관계 정비법'을 제정했던 것은 다만 상부계층의 출산율 저하를 막아보기 위해서였다. 만일 무능력이라는 우회적 이유를 들어 출산을 하지 않는 사람들, 다시 말해 이혼을 결심하고 있거나 이혼한 사람들에게는 출산을 위해서도 다시 결혼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에 이혼한 사람들이 제 짝을 찾는다면 아이도 많이 낳게 될 것이므로 황제는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하는 것을 굳이 방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약혼을 파기하는 것은 금지했다. 왜냐하면 약혼만 하고 다시 파혼했다가 다시 약혼하는 식으로 하다보면 결혼문제에 더 무감각해지고 냉담해진 독신자들은 계속해서 결혼을 연기할 것이고 그가 제재 조치라는 위협수단을 써서라도 막아보려는 출산율 저하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부부들의 이혼을 방해할 수도 방해할 의사도 없었다. 먼저 그는 이전처럼 부부들 중 한 사람의 의지만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일곱 명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이혼의사는 표명되어야 하고 그 집안의 사환 노릇을 하는 자가 대신 통지문을 제출하기만 해도 이혼은 성립된다고 했다. 더욱이 이혼 당한 여자도 여성 시민권을 존중받아 자신이 가져온 지참금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참금 회수 권한이 인정되긴 했으나 전액은 아니었다. 남편의 보유권한으로 인정된 금액은 제외해야 했다. 즉 양육비 및 부인이 남편에게 끼친 손해액, 부인이 낭비한 돈 등이다. 이렇게 회수된 여성들의 지참금은 새로운 남성 구혼자들의 영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지참금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남편은 부인을 붙잡게 되었다. 부인의 인가가 없으면 그 재산을 함부로 운용할 수 없었고 그 다른 어디에서도 담보 설정이 안 되었다. 부인들은 이런저런 조언을 하고 줄곧 따라다니며 일일이 세심하게 배려하는 역할의 회계담당원을 고용했고 이 전문 직원한테서 정식으로 교육까지 받아 직접 거래를 하고 소송을 하고 명령을 내리고 했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서양 고대인들의 일상 생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오리엔트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해 쓰는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워낙 많은 나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그 중 특징적인 몇 개만을 알아보았다. 그리스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아테네가 아니라 잘 접하기 어려운 스파르타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테네 사람들이라고 하면 그 모습이 저절로 연상이 되지만 스파르타 사람이라고 하면 딱히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스파르타의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고작해야 오로지 강인한 전사들만의 나라라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니 다른 어떤 나라들 보다 독특한 생활 관습을 가지고 있고 그 들이 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 고스란히 깔려 있었다. 그래서 특히 스파르타에 대해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집트와 로마도 이번 조사 대상들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많이 접해 본 나라들이긴 하지만 또한 새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이렇듯 이제까지 공부해 왔던 정치·경제·사회 중심의 역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역사 공부의 새로운 재미를 이번 기회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시대에 비해 이 시대에 대한 연구가 현저하게 부족함을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서양 고대인들의 생활에 대해 많은 부분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 또한 일상 생활의 역사에 많은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한다.

키워드

고대,   생활,   의식주,   로마,   스파르타,   이집트,   수메르
  • 가격3,000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5.06.02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997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