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 건국신화 이해의 전제
2. 건국신화와 王權에 대한 관념
3. 건국신화와 의례
4. 맺음말
2. 건국신화와 王權에 대한 관념
3. 건국신화와 의례
4. 맺음말
본문내용
깨뜨리는 것과 같은 의미로, 그럼으로써 왕은 상자(알) 속에서 나오는 시조령의 신성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천황의 즉위 다음 해에 행해진 八十嶋祭는 祭使가 천황의 옷을 담은 상자를 가지고 해변으로 가서 상자를 열고 琴을 탐으로써 천황을 위해 外來魂을 불러들임과 함께 遊離魂을 鎭安시키는 주술적 제의이다.
) 岡田精司, 1970 「卽位儀禮としての八十嶋祭」 『古代王權の祭祀と神話』, 書房
신라 泥文이 지었다는 3편의 가야금곡이 烏, 鼠, 으로서
) 『三國史記』 卷第33 志第1 樂, "泥文所製三曲 一曰烏, 二曰鼠, 三曰 ."
사금갑설화에 나오는 까마귀와 쥐, 琴匣, 八十島祭에서 사용되는 琴과 의례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금갑설화에서 왕의 목숨은 물에서 건져지고 八十島祭도 천황을 상징하는 옷이 물가에서 그 재생력을 얻었다. 이렇듯 물가에서 왕의 옷과 물을 매개로 왕의 재생을 꾀하는 의례는 고구려에서도 행해졌다.
) 『隋書』 卷81 列傳第46 東夷 高麗, "每年初, 聚戱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之.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爲二部, 以水石相 擲, 誼呼馳逐, 再三而止."
이상에서 건국신화가 시조왕제사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여러 의례 행위를 통해 살펴보았다.
한편 건국신화는 여타 신화에 비해 역사적, 정치적 의도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의도성은 의례 과정에서 더 강하게 전달될 수 있었다. 종교적인 의례는 '상기' 과정의 주요한 도구였다. 종교의식은 이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실재 규정과 이것의 적절한 정당화체계를 계속해서 떠오르게 한다.
) Peter L. Berger, 1973 The Social Reality of Religion, Penguin University Books ; 이양구 옮김, 1981 『종교와 사회』, 종로서적, 47∼48쪽
6村(部)의 대표자가 왕을 추대한다는 신라의 건국신화 내용은 신라왕이 신라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집단의 대표자들의 합의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정치 현실을 반영한 것일텐데, 그러한 내용이 정기적으로 의례화됨으로써 사람들은 지배 집단 사이에 놓여있는 권력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신화에 보이는 사회 패턴은 현실 사회의 반영이고, 또한 현실 사회의 패턴은 신화의 그것에 의해 정당성을 갖게 된다. 즉 신화를 재현하는 의례 과정에서 의례에 참여한 구성원들은 현실의 사회 패턴은 신화와 연결된 근원적인 것이며 신성한 것임을 반복적으로 상기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현실 사회의 정치 질서는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고대의 종교적 의례는 또한 정치 과정이기도 했다. 흉노의 공공의례에서 정치적 의논과 결정이 이루어지고 1년 간의 경제 형편과 인적 상황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예이다.
) 『後漢書』 卷89 南匈奴列傳 第79, "匈奴俗 歲有三龍祠 常以正月五月九月戊日祭天神 南單于旣內附 兼祠漢帝 因會諸部 議國事"
신라에서도 1월이나 2월에 거행된 시조왕제사에서 정치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관리가 임명되었으며 행정 사항에 대한 명령이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 나희라, 2003 앞 책, 지식산업사, 92∼97쪽
이렇게 제사 때에 이루어진 정치적 결정들은 결국 신과 인간의 약속이었으므로 절대적임을 포장할 수 있었고, 지배자측에서는 피지배자측의 동의를 가장 효율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이렇듯 고대의 건국신화와 그 의례는 왕권을 신성한 것으로 설명하고 연출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얻어내려고 하였고, 또 현재의 권력 관계를 원초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권력을 향한 여러 경쟁자들로 하여금 현실의 정치적 관계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고대의 건국신화와 그것을 표현하는 왕권의례는 왕권이데올로기로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겠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신라의 건국신화는 결국 왕권신화이며 시조왕제사를 통해 그 의도성이 더욱 강하게 표출될 수 있었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신화와 의례는 신라인들이
) 물론 이때 신라인의 범위는 국가사회 발전의 정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신라의 건국신화와 시조왕제사가 그 의미를 방출하는 것은 초기에는 사로국 구성원들 전체의 문제이었지만, 점차 주변 소국들을 복속하고 그 지배층을 도성으로 불러모아 집권적 국가체제를 정비하게 되면서는 왕경의 구성원들, 보다 좁게는 지배층들의 문제이었을 것이다. 특정 이데올로기의 적용은 어떤 면에서는 지배층을 통일하고 방향성을 제공하는데 봉사한다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논의는 생각해볼 점이다(N.Abercrombie, S. Hill and Bill Turner, 1980 The Dominant Ideolgy Thesis, Allen and Unwin ; David McLellan, 1995 Ideology, Open University Press ; 구승희 옮김, 2002 『이데올로기』, 이후에서 재인용).
공유하던 종교적 관념과 관행들을 기반으로 성립되고 연출됨으로써 신라인들이 그것이 진실되며 신성한 것이라 믿을 수 있게 했고, 그럼으로써 적절한 기능을 수행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건국신화가 신라 시대 전체에서 동질의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불교나 유교 등 보다 합리적이고 세련되고 왕권의 본질과 현상을 수식할 수 있는 이념과 의례들이 채택되면서는 신화적 신성왕권을 내세우는 건국신화와 그 의례의 본질은 많이 희석되었을 것이다. 특히 왕권의 안정성과 초월성을 받쳐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그 이념의 표현인 유교적 예제를 적용하던 中代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고시기 차용한 불교적 신성왕권 개념이 고대 신화적 신성왕권의 관념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고, 신문왕대 만파식적설화에서 보듯이 중대에도 여전히 신성성을 매개로 하여 왕권을 수식하려는 노력이 행해졌고, 유교적 예제 역시 신과 인간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성립되었음을 상기하면, 신라의 건국신화와 그 의례의 기능이 약화되었다하더라도 폐기처분될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왕을 제사하는 신궁제사는 중대 이후에도 여전히 거행되었고 즉위의례로서 기능을 하였다.
) 岡田精司, 1970 「卽位儀禮としての八十嶋祭」 『古代王權の祭祀と神話』, 書房
신라 泥文이 지었다는 3편의 가야금곡이 烏, 鼠, 으로서
) 『三國史記』 卷第33 志第1 樂, "泥文所製三曲 一曰烏, 二曰鼠, 三曰 ."
사금갑설화에 나오는 까마귀와 쥐, 琴匣, 八十島祭에서 사용되는 琴과 의례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금갑설화에서 왕의 목숨은 물에서 건져지고 八十島祭도 천황을 상징하는 옷이 물가에서 그 재생력을 얻었다. 이렇듯 물가에서 왕의 옷과 물을 매개로 왕의 재생을 꾀하는 의례는 고구려에서도 행해졌다.
) 『隋書』 卷81 列傳第46 東夷 高麗, "每年初, 聚戱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之.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爲二部, 以水石相 擲, 誼呼馳逐, 再三而止."
이상에서 건국신화가 시조왕제사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여러 의례 행위를 통해 살펴보았다.
한편 건국신화는 여타 신화에 비해 역사적, 정치적 의도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의도성은 의례 과정에서 더 강하게 전달될 수 있었다. 종교적인 의례는 '상기' 과정의 주요한 도구였다. 종교의식은 이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실재 규정과 이것의 적절한 정당화체계를 계속해서 떠오르게 한다.
) Peter L. Berger, 1973 The Social Reality of Religion, Penguin University Books ; 이양구 옮김, 1981 『종교와 사회』, 종로서적, 47∼48쪽
6村(部)의 대표자가 왕을 추대한다는 신라의 건국신화 내용은 신라왕이 신라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집단의 대표자들의 합의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정치 현실을 반영한 것일텐데, 그러한 내용이 정기적으로 의례화됨으로써 사람들은 지배 집단 사이에 놓여있는 권력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신화에 보이는 사회 패턴은 현실 사회의 반영이고, 또한 현실 사회의 패턴은 신화의 그것에 의해 정당성을 갖게 된다. 즉 신화를 재현하는 의례 과정에서 의례에 참여한 구성원들은 현실의 사회 패턴은 신화와 연결된 근원적인 것이며 신성한 것임을 반복적으로 상기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현실 사회의 정치 질서는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고대의 종교적 의례는 또한 정치 과정이기도 했다. 흉노의 공공의례에서 정치적 의논과 결정이 이루어지고 1년 간의 경제 형편과 인적 상황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예이다.
) 『後漢書』 卷89 南匈奴列傳 第79, "匈奴俗 歲有三龍祠 常以正月五月九月戊日祭天神 南單于旣內附 兼祠漢帝 因會諸部 議國事"
신라에서도 1월이나 2월에 거행된 시조왕제사에서 정치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관리가 임명되었으며 행정 사항에 대한 명령이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 나희라, 2003 앞 책, 지식산업사, 92∼97쪽
이렇게 제사 때에 이루어진 정치적 결정들은 결국 신과 인간의 약속이었으므로 절대적임을 포장할 수 있었고, 지배자측에서는 피지배자측의 동의를 가장 효율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이렇듯 고대의 건국신화와 그 의례는 왕권을 신성한 것으로 설명하고 연출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얻어내려고 하였고, 또 현재의 권력 관계를 원초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권력을 향한 여러 경쟁자들로 하여금 현실의 정치적 관계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고대의 건국신화와 그것을 표현하는 왕권의례는 왕권이데올로기로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겠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신라의 건국신화는 결국 왕권신화이며 시조왕제사를 통해 그 의도성이 더욱 강하게 표출될 수 있었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신화와 의례는 신라인들이
) 물론 이때 신라인의 범위는 국가사회 발전의 정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신라의 건국신화와 시조왕제사가 그 의미를 방출하는 것은 초기에는 사로국 구성원들 전체의 문제이었지만, 점차 주변 소국들을 복속하고 그 지배층을 도성으로 불러모아 집권적 국가체제를 정비하게 되면서는 왕경의 구성원들, 보다 좁게는 지배층들의 문제이었을 것이다. 특정 이데올로기의 적용은 어떤 면에서는 지배층을 통일하고 방향성을 제공하는데 봉사한다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논의는 생각해볼 점이다(N.Abercrombie, S. Hill and Bill Turner, 1980 The Dominant Ideolgy Thesis, Allen and Unwin ; David McLellan, 1995 Ideology, Open University Press ; 구승희 옮김, 2002 『이데올로기』, 이후에서 재인용).
공유하던 종교적 관념과 관행들을 기반으로 성립되고 연출됨으로써 신라인들이 그것이 진실되며 신성한 것이라 믿을 수 있게 했고, 그럼으로써 적절한 기능을 수행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건국신화가 신라 시대 전체에서 동질의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불교나 유교 등 보다 합리적이고 세련되고 왕권의 본질과 현상을 수식할 수 있는 이념과 의례들이 채택되면서는 신화적 신성왕권을 내세우는 건국신화와 그 의례의 본질은 많이 희석되었을 것이다. 특히 왕권의 안정성과 초월성을 받쳐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그 이념의 표현인 유교적 예제를 적용하던 中代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고시기 차용한 불교적 신성왕권 개념이 고대 신화적 신성왕권의 관념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고, 신문왕대 만파식적설화에서 보듯이 중대에도 여전히 신성성을 매개로 하여 왕권을 수식하려는 노력이 행해졌고, 유교적 예제 역시 신과 인간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성립되었음을 상기하면, 신라의 건국신화와 그 의례의 기능이 약화되었다하더라도 폐기처분될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왕을 제사하는 신궁제사는 중대 이후에도 여전히 거행되었고 즉위의례로서 기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