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붕당청치(朋黨政治)와 당쟁(黨爭)
붕당정치의 원인
붕당정치의 전개
- 붕당정치의 형성
- 붕당정치의 변질
- 붕당정치와 탕평책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영조의 탕평책
- 정조의 탕평책
- 세도정치
1. 경주김씨의 세도정치
2.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3. 풍향 조씨의 세도정치
4. 안동김씨의 부활
5. 세도정치의 종결
조선의 붕당정치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조선은 왕권국가 임에도 민주적인 나라였다.
-붕당정치의 전반적인 이해- 외국의 당파
-붕당정치가 정말 조선을 망하게 하였는가.
느 낀 점
붕당청치(朋黨政治)와 당쟁(黨爭)
붕당정치의 원인
붕당정치의 전개
- 붕당정치의 형성
- 붕당정치의 변질
- 붕당정치와 탕평책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영조의 탕평책
- 정조의 탕평책
- 세도정치
1. 경주김씨의 세도정치
2.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3. 풍향 조씨의 세도정치
4. 안동김씨의 부활
5. 세도정치의 종결
조선의 붕당정치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조선은 왕권국가 임에도 민주적인 나라였다.
-붕당정치의 전반적인 이해- 외국의 당파
-붕당정치가 정말 조선을 망하게 하였는가.
느 낀 점
본문내용
나아가 황제는 붕당이 있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그 붕당이 진당 이자 군자당 이라면 재상들뿐만 아니라 황제도 여기 가담해야 한다고 하였다. 요즘 말로 하면 황제도 군자당에 입당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당쟁이나 정쟁이 없는 날이 없고, 소름끼치는 정략과 모략이 없는 시대가 없다. 조선조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나서 사육신을 처참하게 고문해 죽였지만, 중국 역사에서도 명나라 영락제는 방효유 및 그 일가친척과 제자 등 873 명을 죽이는 희대의 살육 극을 벌였다. 우리나라 조선조 연산군에게 장록수, 광해군에겐 개똥이 등이 있었지만 중국 역사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녀들이 있었다. 조선에 장희빈이 있다면 중국에서는 또 서태후나 측천무후가 있다 할 것이다.
당쟁은 또 얼마나 치열했나? 지난날 우리 선비들은 중국의 한. 당. 송을 아주 대단한 치세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전한은 왕의 외척들의 발호로 망하였고, 후한은 왕 측근의 환관의 발호로 망하였다. 당과 송에선 우이당쟁이니, 구법파와 신법파의 싸움이니 하여 당쟁은 또 얼마나 치열하였나? 하나 느낀 것이 정쟁이나 당파 싸움은 어느 시대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 체제는 그 나라의 사회 구조의 산물이지 그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혈액 속에 들어 있는 특이 요소의 반영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근대 이전에 붕당이 존재했다는 말은 그 나라 정치 체제가 근대 정치 체제와 유사할 정도로 발전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조선에만 당쟁이 있고 일본에는 없었던 이유는 일본인의 혈액에는 검푸른 피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본 사회의 구조 자체가 주의와 이념을 가진 정당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주의와 이념이 아니라 칼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정당이 존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붕당정치가 정말 조선을 망하게 하였는가.
일제 학자들은 한국인의 당파성이란 고질적인 것이며 그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다는 논리를 폈다. 과연 그러한가? 망국의 책임이 당쟁과 전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가문과 학벌, 지역별로 나누어져 싸우다 보니 국론이 분열되고 외침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당쟁의 폐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200년간의 당쟁을 한국사 전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실상 나라가 망할 때는 당쟁이 아니라 몇몇 노론 척신 가문의 일당 독재가 시행되고 있었다. 오히려 당쟁의 배경이 되는 사림정치의 틀이 살아 있어서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다면 난국 타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망국의 직접적인 책임은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가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정치 형태인양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 왕조는 벌써 망했어야 했다. 조선 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된 까닭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조선의 문제는 붕당 이후 전개되는 세도 정치 시대이다. 세도 정치는 이념적인 특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매관매직을 능사로 하는 정권이 이념이 있을 수 없었다. 세도 일족은 도시적·상업적 면모가 훨씬 강하여 이들에게 유교 사상이나 윤리는 편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고삐 풀린 관리들은 수탈만을 일삼아 백성의 광범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사회가 혼란에 빠졌고 유교적 경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세도가들은 외세의 물결에 국가적인 대응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느 낀 점
개인적으로 역사를 무지 좋아해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특히 현재와 가장 가까우며 그 잔재들이 오늘날도 산재해 있는 조선은 단연 첫 번째로 꼽힌다.
그러나 붕당정치, 당쟁에 대한 나의 지식은 겨우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배운 것이 전부였다. 개인적으로 싸움의 역사는 우울함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해 조선 후기부터 특히 식민지시절의 역사는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자료 조사를 많이 하고 많이 읽다 보면 내 생각도 차츰 차츰 형성 될 거란 생각에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 속에 나를 빠뜨리는 것으로 레포트 준비를 시작했다.
붕당정치와 당쟁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과거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합리화 작업과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노력을 위해서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했던 일본 사학자들의 틀에 끼어 있다가 이제 막 역사 교과서의 당파싸움, 당쟁들의 용어를 붕당 정치로 바꾸는 등의 노력을 시작으로 조선 역사를 얘기 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인 붕당정치에 대해 자주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본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민족적인 성향까지 끄집어내면서 당쟁의 폐단을 조선에서만 일어난 것처럼 매도하는 일본의 주장은 옳지 않다. 당쟁의 폐해는 붕당정치가 존재 했었던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의 붕당정치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상대 적인 평가로 조선 붕당정치와 당쟁의 폐해를 합리화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열 사람이 똑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 죄 값이 한 사람이 저질렀을 때보다 더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나라의 붕당청치의 부작용과는 별개로 조선 붕당정치와 당쟁의 부정적인 영향은 그 자체로써 평가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조선의 붕당정치는 비판 받아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조선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 되었던 것은 붕당정치가 이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당쟁이 가장 정점에 올랐던 숙종 때 서로 상대방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부정부패가 크게 견제 되었으며 예송이 한창일 무렵에는 정치 무대에서는 정치인들이 당쟁의 승패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지만 민란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백성은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 날 아직도 붕당정치의 잔재가 눈에 띄게 남아있는 듯하다. 일본의 억지 주장을 충분하게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득권 획득을 위해 피를 흘렸던 과거 고위 관료들에 대한 씁쓸한 생각들을 지울 수 없는 건 오늘 날 그 옛날 쾌쾌 묵은 관습을 그대로 내려 받고 있는 듯한 정치권의 그 사람들 때문일까.
중국 역사에서 당쟁이나 정쟁이 없는 날이 없고, 소름끼치는 정략과 모략이 없는 시대가 없다. 조선조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나서 사육신을 처참하게 고문해 죽였지만, 중국 역사에서도 명나라 영락제는 방효유 및 그 일가친척과 제자 등 873 명을 죽이는 희대의 살육 극을 벌였다. 우리나라 조선조 연산군에게 장록수, 광해군에겐 개똥이 등이 있었지만 중국 역사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녀들이 있었다. 조선에 장희빈이 있다면 중국에서는 또 서태후나 측천무후가 있다 할 것이다.
당쟁은 또 얼마나 치열했나? 지난날 우리 선비들은 중국의 한. 당. 송을 아주 대단한 치세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전한은 왕의 외척들의 발호로 망하였고, 후한은 왕 측근의 환관의 발호로 망하였다. 당과 송에선 우이당쟁이니, 구법파와 신법파의 싸움이니 하여 당쟁은 또 얼마나 치열하였나? 하나 느낀 것이 정쟁이나 당파 싸움은 어느 시대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 체제는 그 나라의 사회 구조의 산물이지 그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혈액 속에 들어 있는 특이 요소의 반영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근대 이전에 붕당이 존재했다는 말은 그 나라 정치 체제가 근대 정치 체제와 유사할 정도로 발전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조선에만 당쟁이 있고 일본에는 없었던 이유는 일본인의 혈액에는 검푸른 피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본 사회의 구조 자체가 주의와 이념을 가진 정당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주의와 이념이 아니라 칼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정당이 존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붕당정치가 정말 조선을 망하게 하였는가.
일제 학자들은 한국인의 당파성이란 고질적인 것이며 그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다는 논리를 폈다. 과연 그러한가? 망국의 책임이 당쟁과 전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가문과 학벌, 지역별로 나누어져 싸우다 보니 국론이 분열되고 외침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당쟁의 폐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200년간의 당쟁을 한국사 전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실상 나라가 망할 때는 당쟁이 아니라 몇몇 노론 척신 가문의 일당 독재가 시행되고 있었다. 오히려 당쟁의 배경이 되는 사림정치의 틀이 살아 있어서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다면 난국 타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망국의 직접적인 책임은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가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정치 형태인양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 왕조는 벌써 망했어야 했다. 조선 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된 까닭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조선의 문제는 붕당 이후 전개되는 세도 정치 시대이다. 세도 정치는 이념적인 특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매관매직을 능사로 하는 정권이 이념이 있을 수 없었다. 세도 일족은 도시적·상업적 면모가 훨씬 강하여 이들에게 유교 사상이나 윤리는 편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고삐 풀린 관리들은 수탈만을 일삼아 백성의 광범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사회가 혼란에 빠졌고 유교적 경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세도가들은 외세의 물결에 국가적인 대응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느 낀 점
개인적으로 역사를 무지 좋아해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특히 현재와 가장 가까우며 그 잔재들이 오늘날도 산재해 있는 조선은 단연 첫 번째로 꼽힌다.
그러나 붕당정치, 당쟁에 대한 나의 지식은 겨우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배운 것이 전부였다. 개인적으로 싸움의 역사는 우울함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해 조선 후기부터 특히 식민지시절의 역사는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자료 조사를 많이 하고 많이 읽다 보면 내 생각도 차츰 차츰 형성 될 거란 생각에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 속에 나를 빠뜨리는 것으로 레포트 준비를 시작했다.
붕당정치와 당쟁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과거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합리화 작업과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노력을 위해서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했던 일본 사학자들의 틀에 끼어 있다가 이제 막 역사 교과서의 당파싸움, 당쟁들의 용어를 붕당 정치로 바꾸는 등의 노력을 시작으로 조선 역사를 얘기 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인 붕당정치에 대해 자주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본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민족적인 성향까지 끄집어내면서 당쟁의 폐단을 조선에서만 일어난 것처럼 매도하는 일본의 주장은 옳지 않다. 당쟁의 폐해는 붕당정치가 존재 했었던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의 붕당정치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상대 적인 평가로 조선 붕당정치와 당쟁의 폐해를 합리화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열 사람이 똑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 죄 값이 한 사람이 저질렀을 때보다 더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나라의 붕당청치의 부작용과는 별개로 조선 붕당정치와 당쟁의 부정적인 영향은 그 자체로써 평가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조선의 붕당정치는 비판 받아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조선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 되었던 것은 붕당정치가 이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당쟁이 가장 정점에 올랐던 숙종 때 서로 상대방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부정부패가 크게 견제 되었으며 예송이 한창일 무렵에는 정치 무대에서는 정치인들이 당쟁의 승패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지만 민란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백성은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 날 아직도 붕당정치의 잔재가 눈에 띄게 남아있는 듯하다. 일본의 억지 주장을 충분하게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득권 획득을 위해 피를 흘렸던 과거 고위 관료들에 대한 씁쓸한 생각들을 지울 수 없는 건 오늘 날 그 옛날 쾌쾌 묵은 관습을 그대로 내려 받고 있는 듯한 정치권의 그 사람들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