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기에 앞서
2. 조선시대 후기의 시대상
① 세도(世道)정치란? 그 배경
② 안동 김씨 ․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③ 수취체제의 문란과 통치질서의 와해
3. 민중정권
① 홍경래의 난
② 민란이 전국적 확대
4. 마치며
2. 조선시대 후기의 시대상
① 세도(世道)정치란? 그 배경
② 안동 김씨 ․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③ 수취체제의 문란과 통치질서의 와해
3. 민중정권
① 홍경래의 난
② 민란이 전국적 확대
4. 마치며
본문내용
여하여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세를 불린 봉기군은 진주성으로 몰려가 하룻밤을 지샌 후 19일 우병사 백낙신과 목사 홍병원에게서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공문을 받았다. 그러나 흥분한 봉기군은 우병사를 둘러싸고 죄상을 들주며 협박하고 부정한 관리 권준범과 김희준을 화형시키고 4일 동안 향리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네 명을 때려죽이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또한 부잣집을 습격하여 23개 면에서 126호를 파괴하고 도둑질한 재물을 빼앗았는데 그 피해액이 10만 냥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진주민란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2월 29일 부호군 박규수를 진주 안핵사로 삼아 파견하여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박규수는 3개월에 걸쳐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 처벌상황은 농민측은 효수 10명, 귀양 20명, 곤장 42명, 미결 15명이었고, 관측은 귀양 8명, 곤장 5명, 파직 4명, 미결 5명이었다.
조정의 조기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란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번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충청도에서는 양반들의, 전라도에서는 아전들의 폐단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전라도 관찰사 김시연도 탐학한 관료 중 한 명이었는데, 그의 관할 중 한 곳인 익산의 농인 3천여 명이 1862년 3월 27일에 불법적인 도결(都結)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관청을 습격하여 군수 박희순을 납치하여 인신(印信)과 병부(兵符)을 빼앗았고, 함열현으로 쳐들어가 현령의 병부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민중들은 김시연을 죽이려고 하자 그는 서울로 도망쳤고, 그의 가족들도 전주를 빠져나가자 민중들은 김시연의 모친을 잡아 고문하며 분풀이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정현을 안핵사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고, 이정현은 농민 임치수, 이의식, 문희백 등을 반란 주동죄로 처형하고, 관찰사 김시연과 군수 박희선을 귀양보냈으며, 이방 임종호, 좌수 최학손 등을 효수하였다.
4월 16일에는 전라도 함평에서 정한순의 주동 하에 민란이 일어났다. 함평관아를 습격하여 현감 권규명을 쫓아내고 민가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조정에서는 익산안핵사 이정현에게 함평민란을 수습케하여 주동자 정한순 등을 처형하고 채행렬 등 11명은 귀양을 보냈으며, 현감 권명규를 귀양형에 처하고 좌수 장채성, 호장 이희경, 이방 이흥원 등을 섬으로 유배했다. 조정에서는 임술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해 5월 25일부터 윤 8월 19일까지 4개월 간 "삼정이정절목" 41개조를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고식적 정책에 불과하여 오래가지 못하였고 삼정의 폐단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1863년 말 철종이 죽자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여러 가지 개혁정책이 실시되면서 외형적으로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
4. 마치며
우리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조선시대를 근세라고 구분하며 개화기시대를 근대로 보고 있다. 위의 조선후기의 시대상은 근세로부터 근대로 가는 이행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과도기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 모든 방면에서 서서히 근세에서 근대로 가고 있었다면, 지배층의 권력 독점 현상에 이은 세도정치는 이 시대의 흐름에 역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도정치로 인하여 조선사회는 몰락의 길로 가고 있고, 민중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으며, 조선 시대의 기본인 신분제가 동요하고 정신적 지주인 성리학이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한 와중에 민중들의 의식이 성장하였고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민중들의 반란으로 인해 정책이 바뀌기 시작했으며 근대로의 이행이 더욱 빨라진 것이다. 어느 곳이든 어떤 시대이든지 간에 세상을 바꾸는 세력은 민중임이 또 한번 확인되었던 과제였다.
조정의 조기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란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번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충청도에서는 양반들의, 전라도에서는 아전들의 폐단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전라도 관찰사 김시연도 탐학한 관료 중 한 명이었는데, 그의 관할 중 한 곳인 익산의 농인 3천여 명이 1862년 3월 27일에 불법적인 도결(都結)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관청을 습격하여 군수 박희순을 납치하여 인신(印信)과 병부(兵符)을 빼앗았고, 함열현으로 쳐들어가 현령의 병부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민중들은 김시연을 죽이려고 하자 그는 서울로 도망쳤고, 그의 가족들도 전주를 빠져나가자 민중들은 김시연의 모친을 잡아 고문하며 분풀이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정현을 안핵사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고, 이정현은 농민 임치수, 이의식, 문희백 등을 반란 주동죄로 처형하고, 관찰사 김시연과 군수 박희선을 귀양보냈으며, 이방 임종호, 좌수 최학손 등을 효수하였다.
4월 16일에는 전라도 함평에서 정한순의 주동 하에 민란이 일어났다. 함평관아를 습격하여 현감 권규명을 쫓아내고 민가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조정에서는 익산안핵사 이정현에게 함평민란을 수습케하여 주동자 정한순 등을 처형하고 채행렬 등 11명은 귀양을 보냈으며, 현감 권명규를 귀양형에 처하고 좌수 장채성, 호장 이희경, 이방 이흥원 등을 섬으로 유배했다. 조정에서는 임술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해 5월 25일부터 윤 8월 19일까지 4개월 간 "삼정이정절목" 41개조를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고식적 정책에 불과하여 오래가지 못하였고 삼정의 폐단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1863년 말 철종이 죽자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여러 가지 개혁정책이 실시되면서 외형적으로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
4. 마치며
우리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조선시대를 근세라고 구분하며 개화기시대를 근대로 보고 있다. 위의 조선후기의 시대상은 근세로부터 근대로 가는 이행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과도기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 모든 방면에서 서서히 근세에서 근대로 가고 있었다면, 지배층의 권력 독점 현상에 이은 세도정치는 이 시대의 흐름에 역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도정치로 인하여 조선사회는 몰락의 길로 가고 있고, 민중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으며, 조선 시대의 기본인 신분제가 동요하고 정신적 지주인 성리학이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한 와중에 민중들의 의식이 성장하였고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민중들의 반란으로 인해 정책이 바뀌기 시작했으며 근대로의 이행이 더욱 빨라진 것이다. 어느 곳이든 어떤 시대이든지 간에 세상을 바꾸는 세력은 민중임이 또 한번 확인되었던 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