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왜 아리야인 논쟁인가?
2.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의 전개
3.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의 모순과 한계
4. 힌두 근본주의의 역사 서술과 힌두 민족주의
5. 맺음말
2.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의 전개
3.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의 모순과 한계
4. 힌두 근본주의의 역사 서술과 힌두 민족주의
5. 맺음말
본문내용
부터의 도래를 의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리야인의 도래를 주장하는 것을 제국주의와 관련된 것으로 폄하하지도 않았다.
5. 맺음말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은 18세기말 이후 일부 유럽 학계가 어족과 종족을 혼동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당시의 아리야인 이론은 기본적으로 인도 사회의 시원(始原) - 카스트와 관련하여 - 에 관한 역사 해석에 관한 시론일 뿐 역사학을 정치화의 일환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를 식민 통치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역사를 날조하면서 그리고 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일환으로 민족주의 진영에서 이를 활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적 의미가 강화되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이론의 주창자들이 종교 근본주의라는 비학문적인 방법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일부 언론의 감감적 방법을 통하여 확대 재생산하고 대중화시키면서 더욱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최근의 아리야인의 문제는 과거 식민지 상황에서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근의 주장은 역사학적 논쟁이 아닌 정치적 구호일 뿐이다. 이론의 주창자들 가운데 역사학이나 언어학 그리고 고고학을 통해 보다 과학적이고 전문적으로 접근하여 자료를 확보하고 그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고고학자 랄이 유일하다. 그런데 그마저도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이 드라비다인이라고 하는 주장이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도-아리야인일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고, 이를 위해 인더스 문자가 완벽하게 해독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Lal, 1998, 123). 랄 이외의 연구자들의 주장은 이미 학문의 본령을 넘어 종교라는 미명하에 파시스트적 정치 행위를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그 정치 행위가 종교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힌두교가 ‘힌두’라는 ‘상상의 공동체’(Thapar, 1993, 60~88)에 기반을 두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고 따라서 그 내부에 힌두뜨와와 같은 허구의 이데올로기가 왜곡 변질될 수 있는 여지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힌두뜨와 이데올로기의 중심은 아리야인들의 원주지는 인도이고 그들은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발전시킨 후 인도아대륙 전체와 서아시아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아리야인의 침입 같은 것은 인도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롤리는 아리야인의 침입설을 주장하는 것은 인도가 아리야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스키타인족, 훈족, 아랍족, 튀르크족, 포르투갈인, 영국인 등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왔다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의 일종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기원을 외침의 부인과 관련짓는 것은 북한 역사학계의 대단군 민족주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북한 학계는 정인보의 대단군주의의 뿌리로서의 부여 계승 의식을 천명하고 있는데 이 핵심은 기자 동래설의 부인을 통한 외래 이주민에 대한 부정이다. (박광용, 1992, 233)
인도를 하나의 분명한 문명 중심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유럽 중심주의의 역사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Frawley, 2001, 3). 그 안에서 베다는 침략자들의 유산이 아닌 인류 정신 문명의 요람으로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힌두뜨와 이론 안에서 힌두들은 유목 생활을 영위하면서 목가적이고 명상적인 문명을 발전시켰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러한 문명을 상실해나가는 것으로 역사는 기술되었다. 그렇지만 비록 정신 문명이 점차 약화되긴 했을지라도 아리야의 땅 즉 인도에 특별한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 기독교도 등과 같은 이민족들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갈등과 반목 그리고 역사의 퇴보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 지배의 정당화를 위한 역사 왜곡에 대한 반발로서의 정당성은 갖출 수는 있겠으나 그 반발의 근거를 그들 유럽의 낭만주의 동양학자들이 설정해 놓은 아리야인 선민 의식과 동양론에 둠으로써 또 다른 역사의 왜곡이 된다. 그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와 동양론을 통한 역사의 왜곡과 영국 제국주의의 분할-통치(Divide & Rule) 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의 본질은 그들의 주장이 다름 아닌 식민주의 경험 위에서 지배자인 유럽과 피지배자인 인도 사이에 존재하는 동양론의 신화 위에서 식민주의자들과 동일한 정치 역학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민족과 국가의 ‘분단’과 한반도의 경우와는 달리 인도아대륙에서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나뉨은 하나의 국가가 종교로 인해 분단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국가로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도아대륙에 대해 유럽에서 형성된 ‘민족’ 혹은 ‘국민 국가’의 성격즉 ‘국가를 형성하려는 정치적 행위’(최갑수, 1995, 16)를 지나치게 적용시킨 결과라고 본다. 극히 최근의 ’정치적 행위’로서의 측면을 제외하고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인민들 간에는 역사, 혈연, 언어, 문화, 영토 등의 측면에서 분명한 유대감을 공유하고 있다. 두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종교가 다르지만 그것도 수세기 동안 두 종교 집단이 독자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지 않고 동일한 공동체 내에서 살아 왔다는 점을 보면 종교가 다르다는 사실이 민족 구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역사적 의미로 볼 때 인도아대륙의 ‘분리’는 한반도의 ‘분단’과 하등에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극심한 대치가 가지고 온 결과로서, ‘역사 자체를 신화화하여 이를 현실 정치의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하려는 것’(박경철, 1998, 9)으로서 북한 학계의 단군릉 평양설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이 최근 크게 부각되는 데는 최근의 세계적인 반서구 문명의 조류도 한 몫 거들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동양론을 바탕으로 하여 ‘문명의 충돌’이라는 미명하에 종교를 통한 현실 왜곡의 풍조가 계속 되면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역사학’은 학문적 논쟁의 차원을 넘어 보다 심각한 정치적 오염의 단계로 비화될 것이고 그것은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에 극심한 타격을 줄 것이다.
5. 맺음말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은 18세기말 이후 일부 유럽 학계가 어족과 종족을 혼동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당시의 아리야인 이론은 기본적으로 인도 사회의 시원(始原) - 카스트와 관련하여 - 에 관한 역사 해석에 관한 시론일 뿐 역사학을 정치화의 일환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를 식민 통치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역사를 날조하면서 그리고 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일환으로 민족주의 진영에서 이를 활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적 의미가 강화되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이론의 주창자들이 종교 근본주의라는 비학문적인 방법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일부 언론의 감감적 방법을 통하여 확대 재생산하고 대중화시키면서 더욱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최근의 아리야인의 문제는 과거 식민지 상황에서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근의 주장은 역사학적 논쟁이 아닌 정치적 구호일 뿐이다. 이론의 주창자들 가운데 역사학이나 언어학 그리고 고고학을 통해 보다 과학적이고 전문적으로 접근하여 자료를 확보하고 그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고고학자 랄이 유일하다. 그런데 그마저도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이 드라비다인이라고 하는 주장이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도-아리야인일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고, 이를 위해 인더스 문자가 완벽하게 해독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Lal, 1998, 123). 랄 이외의 연구자들의 주장은 이미 학문의 본령을 넘어 종교라는 미명하에 파시스트적 정치 행위를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그 정치 행위가 종교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힌두교가 ‘힌두’라는 ‘상상의 공동체’(Thapar, 1993, 60~88)에 기반을 두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고 따라서 그 내부에 힌두뜨와와 같은 허구의 이데올로기가 왜곡 변질될 수 있는 여지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힌두뜨와 이데올로기의 중심은 아리야인들의 원주지는 인도이고 그들은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발전시킨 후 인도아대륙 전체와 서아시아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아리야인의 침입 같은 것은 인도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롤리는 아리야인의 침입설을 주장하는 것은 인도가 아리야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스키타인족, 훈족, 아랍족, 튀르크족, 포르투갈인, 영국인 등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왔다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의 일종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기원을 외침의 부인과 관련짓는 것은 북한 역사학계의 대단군 민족주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북한 학계는 정인보의 대단군주의의 뿌리로서의 부여 계승 의식을 천명하고 있는데 이 핵심은 기자 동래설의 부인을 통한 외래 이주민에 대한 부정이다. (박광용, 1992, 233)
인도를 하나의 분명한 문명 중심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유럽 중심주의의 역사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Frawley, 2001, 3). 그 안에서 베다는 침략자들의 유산이 아닌 인류 정신 문명의 요람으로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힌두뜨와 이론 안에서 힌두들은 유목 생활을 영위하면서 목가적이고 명상적인 문명을 발전시켰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러한 문명을 상실해나가는 것으로 역사는 기술되었다. 그렇지만 비록 정신 문명이 점차 약화되긴 했을지라도 아리야의 땅 즉 인도에 특별한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 기독교도 등과 같은 이민족들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갈등과 반목 그리고 역사의 퇴보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 지배의 정당화를 위한 역사 왜곡에 대한 반발로서의 정당성은 갖출 수는 있겠으나 그 반발의 근거를 그들 유럽의 낭만주의 동양학자들이 설정해 놓은 아리야인 선민 의식과 동양론에 둠으로써 또 다른 역사의 왜곡이 된다. 그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와 동양론을 통한 역사의 왜곡과 영국 제국주의의 분할-통치(Divide & Rule) 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의 본질은 그들의 주장이 다름 아닌 식민주의 경험 위에서 지배자인 유럽과 피지배자인 인도 사이에 존재하는 동양론의 신화 위에서 식민주의자들과 동일한 정치 역학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민족과 국가의 ‘분단’과 한반도의 경우와는 달리 인도아대륙에서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나뉨은 하나의 국가가 종교로 인해 분단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국가로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도아대륙에 대해 유럽에서 형성된 ‘민족’ 혹은 ‘국민 국가’의 성격즉 ‘국가를 형성하려는 정치적 행위’(최갑수, 1995, 16)를 지나치게 적용시킨 결과라고 본다. 극히 최근의 ’정치적 행위’로서의 측면을 제외하고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인민들 간에는 역사, 혈연, 언어, 문화, 영토 등의 측면에서 분명한 유대감을 공유하고 있다. 두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종교가 다르지만 그것도 수세기 동안 두 종교 집단이 독자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지 않고 동일한 공동체 내에서 살아 왔다는 점을 보면 종교가 다르다는 사실이 민족 구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역사적 의미로 볼 때 인도아대륙의 ‘분리’는 한반도의 ‘분단’과 하등에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극심한 대치가 가지고 온 결과로서, ‘역사 자체를 신화화하여 이를 현실 정치의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하려는 것’(박경철, 1998, 9)으로서 북한 학계의 단군릉 평양설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이 최근 크게 부각되는 데는 최근의 세계적인 반서구 문명의 조류도 한 몫 거들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동양론을 바탕으로 하여 ‘문명의 충돌’이라는 미명하에 종교를 통한 현실 왜곡의 풍조가 계속 되면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역사학’은 학문적 논쟁의 차원을 넘어 보다 심각한 정치적 오염의 단계로 비화될 것이고 그것은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에 극심한 타격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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