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부여의 설화
2. 부여의 건국
3. 부여(동부여)의 위치
4. 부여의 대외 관계
5. 부여의 신분제
6. 부여의 통치구조
7. 부여인의 생활
8.부여의 쇠퇴와 부흥운동
9. 나오며
2. 부여의 건국
3. 부여(동부여)의 위치
4. 부여의 대외 관계
5. 부여의 신분제
6. 부여의 통치구조
7. 부여인의 생활
8.부여의 쇠퇴와 부흥운동
9. 나오며
본문내용
다는 것은 국가 단계이다. 동부여는 법이 엄격하였으므로 그 사회가 그만큼 발단한 국가단계였다.
음란행위가 가혹하게 처벌받은 것은 그 당시 씨족사회로서 씨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인데 씨족마을에서 음란한 행위가 용납된다면 씨족내부 질서가 흐트러지고 그렇게 되면 사회질서조직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공동체의 조직 원리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부여에서는 죄인들을 감금하기 위한 감옥이 존재하였고 감옥은 수도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에 있었다. 죄인들은 사형수 이외의 모든 법률 위반자들이 감금하였는데 특히 중대한 범법자들은 제가들의 협의에 따라 처형이 되었다.
(2)문화
1년에 1회 12월에 영고 씨족사회의 유습을 계승한 수확감사제를 하였다.
고구려, 동예(10월)와 달리 추수감사제를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인 12월에 거행하였던 것은 공동수렵을 행하던 전통을 계승했다. 국중 대회에서 공동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공동의식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들이 참여하여 결속을 도모하고 민속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정치적 통합기능도 있다. 나라의 축제기간이나 경사스러운 날이면 형벌의 집행 중단 죄수를 풀어줌으로써 축제기간을 모든 백성과 누리려 하였다.
축제 기간에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낮이나 밤에 길을 다닐 때 모두 노래를 즐겨 불렀다.
전쟁을 할 때에는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소원을 빌었으며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파악했다.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있으면 길하고 하느님의 숭배사상이 강했다.
(3)경제
동부여에는 송리강, 눈강, 흑룡강, 여르구나하, 누스리강 등의 크고 긴 강줄기가 있고 동부 평원이라 부르는 넓은 평야가 있어 목축업 담비 살쾡이 옥 진주 풍부하였다. 주로 석기나 목기를 이용하여 농경을 시작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후로는 철기 문화의 영향으로 쇠붙이로 만든 호미 가래 쟁기 말 소 등을 이용하여 농업을 하였다.
3세기 부여 사회 일면은 공동체적 유제가 존재하여 있었고 다른 면 에서는 사회분화가 진전되었다.
8.부여의 쇠퇴와 부흥운동
건국 초에는 고구려와 형제의 나라다 하여 사이가 좋았으나 고구려가 영토를 키워 나가자 제압할 필요성을 느낌을 가졌다. AD.13년 전쟁에서 동부여는 고구려에 크게 패하여 사회적인 동요를 가져오고 얼마 후 AD.22년 고구려가 동부여 정벌에 나서서 동부여의 왕 대소가 전사하였고 부여의 저항으로 고구려 격퇴 그러나 국가적인 타격으로 급격히 약화 외교를 통한 견제와 화친 중국 동한과 화친정책을 고수하였다.
고구려가 동한을 공격하면 동부여는 같은 민족인 고구려를 도와주지 않고 이민족을 도운 것에 대한 부여 지배층에 대한 분열 주체의식 약화가 되었다.
3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부여국은 격심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이것은 주변 정서가 급격히 변화하여 부여의 지형은 대평원에 자리 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데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3세기 중반이후 중국의 통일 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 세력이 흉기 하였다. 이것은 동 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AD.285년 모용(선비족)의 침입으로 동부여의 왕 의려는 자살하였고 도읍이 점령당하였다.
의려의 뒤를 이어 나라를 재건한 의라는 모용의 거듭된 침입을 받는다. 부여가 모용씨의 침입을 받기 전 백제의 침략을 받았는데 이것을 해상발전을 통한 백제가 요서 진출의 한 근거로 보려는 설이 있는데 백제가 부여를 치기 위해서는 해상만으로 전쟁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고구려를 넘어 부여와 전쟁을 할 수는 없다. 백제라는 것은 물길의 백제라는 하나의 종족으로 보아야한다.
부여는 물길의 침략을 받은 후 고립무원 상태로 있다가 전연의 공격(346년)으로 5만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부여의 중심력을 잃었고 부여의 세력이 거의 와해가 되었다. 결국 5세기 초 고구려의 대규모 부여 정벌을 광개토대왕이 공격하여 410년에 64개의 성과 1400마을을 빼앗아 갔고 부여 정벌로 인한 부여의 대다수 주민과 광대한 지역이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부여 왕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고 동부여의 신하의 나라라 생각을 하였던 읍루도 반기를 들었으나 동부여는 이를 진압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이후 부여는 급속히 악화 되어 5세기 말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 494년 국왕과 그 일족이 고구려에 망명하였다.
8. 나오며
음란행위가 가혹하게 처벌받은 것은 그 당시 씨족사회로서 씨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인데 씨족마을에서 음란한 행위가 용납된다면 씨족내부 질서가 흐트러지고 그렇게 되면 사회질서조직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공동체의 조직 원리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부여에서는 죄인들을 감금하기 위한 감옥이 존재하였고 감옥은 수도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에 있었다. 죄인들은 사형수 이외의 모든 법률 위반자들이 감금하였는데 특히 중대한 범법자들은 제가들의 협의에 따라 처형이 되었다.
(2)문화
1년에 1회 12월에 영고 씨족사회의 유습을 계승한 수확감사제를 하였다.
고구려, 동예(10월)와 달리 추수감사제를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인 12월에 거행하였던 것은 공동수렵을 행하던 전통을 계승했다. 국중 대회에서 공동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공동의식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들이 참여하여 결속을 도모하고 민속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정치적 통합기능도 있다. 나라의 축제기간이나 경사스러운 날이면 형벌의 집행 중단 죄수를 풀어줌으로써 축제기간을 모든 백성과 누리려 하였다.
축제 기간에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낮이나 밤에 길을 다닐 때 모두 노래를 즐겨 불렀다.
전쟁을 할 때에는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소원을 빌었으며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파악했다.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있으면 길하고 하느님의 숭배사상이 강했다.
(3)경제
동부여에는 송리강, 눈강, 흑룡강, 여르구나하, 누스리강 등의 크고 긴 강줄기가 있고 동부 평원이라 부르는 넓은 평야가 있어 목축업 담비 살쾡이 옥 진주 풍부하였다. 주로 석기나 목기를 이용하여 농경을 시작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후로는 철기 문화의 영향으로 쇠붙이로 만든 호미 가래 쟁기 말 소 등을 이용하여 농업을 하였다.
3세기 부여 사회 일면은 공동체적 유제가 존재하여 있었고 다른 면 에서는 사회분화가 진전되었다.
8.부여의 쇠퇴와 부흥운동
건국 초에는 고구려와 형제의 나라다 하여 사이가 좋았으나 고구려가 영토를 키워 나가자 제압할 필요성을 느낌을 가졌다. AD.13년 전쟁에서 동부여는 고구려에 크게 패하여 사회적인 동요를 가져오고 얼마 후 AD.22년 고구려가 동부여 정벌에 나서서 동부여의 왕 대소가 전사하였고 부여의 저항으로 고구려 격퇴 그러나 국가적인 타격으로 급격히 약화 외교를 통한 견제와 화친 중국 동한과 화친정책을 고수하였다.
고구려가 동한을 공격하면 동부여는 같은 민족인 고구려를 도와주지 않고 이민족을 도운 것에 대한 부여 지배층에 대한 분열 주체의식 약화가 되었다.
3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부여국은 격심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이것은 주변 정서가 급격히 변화하여 부여의 지형은 대평원에 자리 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데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3세기 중반이후 중국의 통일 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 세력이 흉기 하였다. 이것은 동 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AD.285년 모용(선비족)의 침입으로 동부여의 왕 의려는 자살하였고 도읍이 점령당하였다.
의려의 뒤를 이어 나라를 재건한 의라는 모용의 거듭된 침입을 받는다. 부여가 모용씨의 침입을 받기 전 백제의 침략을 받았는데 이것을 해상발전을 통한 백제가 요서 진출의 한 근거로 보려는 설이 있는데 백제가 부여를 치기 위해서는 해상만으로 전쟁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고구려를 넘어 부여와 전쟁을 할 수는 없다. 백제라는 것은 물길의 백제라는 하나의 종족으로 보아야한다.
부여는 물길의 침략을 받은 후 고립무원 상태로 있다가 전연의 공격(346년)으로 5만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부여의 중심력을 잃었고 부여의 세력이 거의 와해가 되었다. 결국 5세기 초 고구려의 대규모 부여 정벌을 광개토대왕이 공격하여 410년에 64개의 성과 1400마을을 빼앗아 갔고 부여 정벌로 인한 부여의 대다수 주민과 광대한 지역이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부여 왕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고 동부여의 신하의 나라라 생각을 하였던 읍루도 반기를 들었으나 동부여는 이를 진압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이후 부여는 급속히 악화 되어 5세기 말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 494년 국왕과 그 일족이 고구려에 망명하였다.
8.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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