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오늘의 해석학적 도전
2. 해석사 연구의 장애물들
3. 문자적이냐 비유적이냐?
4. 명료함이냐 모호함이냐?
5. 상대적이냐 절대적이냐?
2. 해석사 연구의 장애물들
3. 문자적이냐 비유적이냐?
4. 명료함이냐 모호함이냐?
5. 상대적이냐 절대적이냐?
본문내용
스트를 해석한다. 원칙은, 어떤 문헌을 다룰 때나 가장 근본이 되는 해석학적 원리이다. 그것은 사실상 문맥에 근거한 해석의 원리이다.
교회와 전통
교회의 가르침에 순복하는 문제가 성경의 명료성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종교개혁자들은 전통과 교회의 권위에 반대했지만, 그것은 오직 이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전복하려 한 한도 내에서였다. 그들은 교회의 주해적 전통이 성경에 종속되게 사용될 때의 그 가치를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전통의 남용과의 단절을 뜻하지만 전통 자체와의 단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개혁자들이 가졌던 기독교회 전체와의 공동체적 동질감에 관한 많은 것을 말해준다. 성경을 자율적인 개인의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기들이 교회에 주어진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을 때 가장 힘 있게 해석을 했다.
제 5장
상대적이냐 절대적이냐?
성경해석이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면 그러한 성경해석을 신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 본문 자체를 상대적인 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들에서 현대의 상황화 논쟁이 시작된다. 물론 상황화가 많은 경우 복음주의 진영에서 금어의 취급을 받지만 그것의 기본 개념까지도 포기해 버린다면 잘못된 일이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특정의 텍스트를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또 다른 역사적 상황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상황화할 것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성경의 완전성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상황화할 것인가이다. 해석 역사는 이점에서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해석
고전적인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은 주해와 적용 사이에 명확한 구분을 요구한다. 이런 구분은 지난 두 세기 동안 해석학적 진보의 토대가 되어왔다. 그러나 “본문을 현재에 적용시킴이 없이 주해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하는 것이 논쟁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장은 “주해는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언제나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유대교의 주해서인 미드라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신구약 중간기 동안 성경 해석의 발전인데 해석학적 전통인 소위 구전 율법(Oral Law)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분리주의 유대인 집단인 쿰란 공동체의 주된 개념은 종말론적인 것으로 그들은 종말의 때에 살고 있고,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자신들 가운데 성취되고 있으며 자신은 역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고 믿었다. 이 같은 주해 방법을 페셰르 해석법이라고 한다.
메시야 예언의 수수께끼
신약 저자들에 의한 예언 해석은 “상황화”의 또 다른 실례가 아닐까? 또한 메시아 예언의 미래 예언적 요소를 희생시키지 않고 그 원래 배경을 온전하고 공평하게 다루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먼저는 선지자 자신이 선포한 내용이 메시야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으며 온존하고 공평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해석가들이 인간 저자가 뜻한 의미와 하나님이 뜻하신 의미를 예리하게 구별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우리는 성취된 예언과 상황화(혹은 적용?)는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원래의 청중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은 그들의 지평선을 확대시켜 그들에게 예언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제한된 시각을 초월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신 것이 확실하다.
현대 세계에서의 고대의 계명
성경의 신적 권위는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임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이 일반적으로 모든 상황에 맞게 해석과 적용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 계명의 절대성은 사라진다. 구약의 계명들이 현대에서 다양하게 적용되지만 그것은 성경 가르침의 전체적인 틀 속에서 평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신지들은 성경의 어떤 계명들은 비록 성경의 후대 계시에 의해 명백히 대체되지 않는다 해도 일시적이거나 제한된 의의만을 가졌을 가능성을
인식한다. 그러기 위해 문법적-역사적 주해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의미와 함의의 구별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먼저 성경 본문의 의미를 그 원래의 맥락에서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한다면 이를 책임성 있게 상황화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칸트와 성경 해석
우리가 성경이 영구적인 객관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해도 인간은 그와 같은 객관성을 획득할 수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해 해석사는 거의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성경 해석에 칸트의 사상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풍유적 해석의 부활과 극히 유사하게 들리는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슐라이에르마허에서 불트만까지
슐라이에르마허 이전에는 성경 해석학 분야가 인간 오성의 일반적인 구조 속에 주의 깊게 통합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해석학적 순환”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이를 해석학 전체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즉, 주어진 문장의 이해는 두 가지 지식, 곧 인간과 대상에 관한 예비적 지식이다. 완전한 지식은 언제나 뚜렷한 순환을 포함하며, 각 부분은 오직 전체 및 그것이 속한 모체의 일부로만 이해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을 즉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세기 말경 딜타이는 인간의 오성과 해석을 분석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영국 철학자 콜링우드는 이 주제를 다루면서 “과거는 역사가가 지각을 사용해서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주어진 사실이 결단코 아니다”라는 견해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연관된 관심사는 루돌프 불트만의 성경 내러티브의 역사적 신빙성을 거의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선입견 없이 주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 해석사는 칸트적 이분법으로부터 성경 해석은 결코 객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하는 최근의 주장으로 공격받았다. 오성과 성경해석에 대한 해답은 궁극적으로 신학적인이다. 성경 해석의 과제는 자율적인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은 명령과 함께 그 명령을 성취할 능력도 주신다.
교회와 전통
교회의 가르침에 순복하는 문제가 성경의 명료성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종교개혁자들은 전통과 교회의 권위에 반대했지만, 그것은 오직 이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전복하려 한 한도 내에서였다. 그들은 교회의 주해적 전통이 성경에 종속되게 사용될 때의 그 가치를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전통의 남용과의 단절을 뜻하지만 전통 자체와의 단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개혁자들이 가졌던 기독교회 전체와의 공동체적 동질감에 관한 많은 것을 말해준다. 성경을 자율적인 개인의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기들이 교회에 주어진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을 때 가장 힘 있게 해석을 했다.
제 5장
상대적이냐 절대적이냐?
성경해석이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면 그러한 성경해석을 신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 본문 자체를 상대적인 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들에서 현대의 상황화 논쟁이 시작된다. 물론 상황화가 많은 경우 복음주의 진영에서 금어의 취급을 받지만 그것의 기본 개념까지도 포기해 버린다면 잘못된 일이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특정의 텍스트를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또 다른 역사적 상황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상황화할 것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성경의 완전성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상황화할 것인가이다. 해석 역사는 이점에서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해석
고전적인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은 주해와 적용 사이에 명확한 구분을 요구한다. 이런 구분은 지난 두 세기 동안 해석학적 진보의 토대가 되어왔다. 그러나 “본문을 현재에 적용시킴이 없이 주해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하는 것이 논쟁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장은 “주해는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언제나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유대교의 주해서인 미드라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신구약 중간기 동안 성경 해석의 발전인데 해석학적 전통인 소위 구전 율법(Oral Law)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분리주의 유대인 집단인 쿰란 공동체의 주된 개념은 종말론적인 것으로 그들은 종말의 때에 살고 있고,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자신들 가운데 성취되고 있으며 자신은 역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고 믿었다. 이 같은 주해 방법을 페셰르 해석법이라고 한다.
메시야 예언의 수수께끼
신약 저자들에 의한 예언 해석은 “상황화”의 또 다른 실례가 아닐까? 또한 메시아 예언의 미래 예언적 요소를 희생시키지 않고 그 원래 배경을 온전하고 공평하게 다루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먼저는 선지자 자신이 선포한 내용이 메시야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으며 온존하고 공평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해석가들이 인간 저자가 뜻한 의미와 하나님이 뜻하신 의미를 예리하게 구별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우리는 성취된 예언과 상황화(혹은 적용?)는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원래의 청중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은 그들의 지평선을 확대시켜 그들에게 예언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제한된 시각을 초월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신 것이 확실하다.
현대 세계에서의 고대의 계명
성경의 신적 권위는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임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이 일반적으로 모든 상황에 맞게 해석과 적용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 계명의 절대성은 사라진다. 구약의 계명들이 현대에서 다양하게 적용되지만 그것은 성경 가르침의 전체적인 틀 속에서 평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신지들은 성경의 어떤 계명들은 비록 성경의 후대 계시에 의해 명백히 대체되지 않는다 해도 일시적이거나 제한된 의의만을 가졌을 가능성을
인식한다. 그러기 위해 문법적-역사적 주해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의미와 함의의 구별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먼저 성경 본문의 의미를 그 원래의 맥락에서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한다면 이를 책임성 있게 상황화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칸트와 성경 해석
우리가 성경이 영구적인 객관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해도 인간은 그와 같은 객관성을 획득할 수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해 해석사는 거의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성경 해석에 칸트의 사상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풍유적 해석의 부활과 극히 유사하게 들리는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슐라이에르마허에서 불트만까지
슐라이에르마허 이전에는 성경 해석학 분야가 인간 오성의 일반적인 구조 속에 주의 깊게 통합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해석학적 순환”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이를 해석학 전체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즉, 주어진 문장의 이해는 두 가지 지식, 곧 인간과 대상에 관한 예비적 지식이다. 완전한 지식은 언제나 뚜렷한 순환을 포함하며, 각 부분은 오직 전체 및 그것이 속한 모체의 일부로만 이해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을 즉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세기 말경 딜타이는 인간의 오성과 해석을 분석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영국 철학자 콜링우드는 이 주제를 다루면서 “과거는 역사가가 지각을 사용해서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주어진 사실이 결단코 아니다”라는 견해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연관된 관심사는 루돌프 불트만의 성경 내러티브의 역사적 신빙성을 거의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선입견 없이 주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 해석사는 칸트적 이분법으로부터 성경 해석은 결코 객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하는 최근의 주장으로 공격받았다. 오성과 성경해석에 대한 해답은 궁극적으로 신학적인이다. 성경 해석의 과제는 자율적인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은 명령과 함께 그 명령을 성취할 능력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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