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芥川龍之介 -
2. 라쇼몽 -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3. 여러 미디어 속에서의 라쇼몽 - 영화와 연극
2. 라쇼몽 -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3. 여러 미디어 속에서의 라쇼몽 - 영화와 연극
본문내용
타가와의 이 암울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는 한 천재작가의 사상과 부정적인 사고, 그리고 자살로 이어지는 비참한 결말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3. 여러 미디어 속에서의 라쇼몽 - 영화와 연극
2005년 3월 30일부터 5월 29일까지,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공식지정작으로 나생문, 즉 라쇼몽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나는 시작한 다음날인 4월 1일날 보러 갔었는데 몇 번씩 매진행렬을 장식한 앵콜작 답게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라쇼몽이라는 소설이 연극이 되었다는 데 의문을 품었다. 50년대 작품인 영화 라쇼몽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내가 아는 라쇼몽은 소설 라쇼몽 뿐이었다. 하인과 노파 둘이서 나누는 대사가 전부인 이 소설을 연극으로 꾸민다?
하지만 보고나니 연극과 소설의 내용은 달랐다. 몇몇 캐릭터 속에 그 모습이 녹아있긴 했지만 인물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그 중심 주제는 같았지만, 연극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인지 스토리는 달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연극과 영화의 스토리가 같다고 한다. 그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등장인물로는 스님, 나무꾼, 가발장수, 산적 타조마루, 무사, 무사의 부인, 무녀가 등장한다. 어느 비오는 날, 스님과 나무꾼은 낡은 라쇼몽 안에서 침통한 얼굴로 비를 피하고 있다. 이때 등장한 가발장수. 그는 라쇼몽에 버려진 시체의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자이다. 나무꾼과 스님은 그것을 악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발장수는 위선을 떠는 인간보다 먹고 살기 위해 본능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자신이 옳다고 하며 다른 이들을 비웃는다. 그러다가 둘의 침통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들을 보챈다. 스님은 이날 있었던 재판 때문이라고 하며 그 내용을 말해 준다.
재판의 이유는 간단하다. 산적 타조마루가 지나가던 무사를 죽이고 그 부인을 겁탈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타조마루와 무사의 부인의 증언이 엇갈린데다, 무녀를 불러 들은 죽은 무사의 혼이 증언한 것마저도 그들의 말과 모두 엇갈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은 이 일을 기묘하게 생각하며 침통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열쇠는 그들의 곁에 있던 나무꾼이 쥐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이 사건 현장을 모두 목격했던 것이다. 나무꾼의 증언으로 나머지 세 사람은 다 제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해 뒤틀린 증언을 했다는 게 드러나고 사건은 일단락되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나무꾼이 저지른 악행이 드러나고 나무꾼만큼은 믿고 있었던 스님은 큰 충격을 받는다. 가발장수는 착한 척 위선을 떨었던 나무꾼을 비웃었고 나무꾼은 자책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그때, 그들은 버려진 한 아이를 발견하고 나무꾼은 그 아이를 잘 키움으로해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연극이 라쇼몽의 소설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희망을 주었다는 점이다. 어린아이. 이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로 인해 나무꾼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들은 혼탁한 세상 속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받는다.
라쇼몽은 분명 수작이다. 인간의 깊은 내면의 나약하고 어두운 면을 파헤쳤고 이것은 분명 인간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끝은 하인이 달아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였고 이를 읽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낄 것이다.
바로 이 부정적이고 희망이 없는 생각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닐까. 어두운 세상이라도, 인간들은 희망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조금이라도 따스한 이 연극의 결말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3. 여러 미디어 속에서의 라쇼몽 - 영화와 연극
2005년 3월 30일부터 5월 29일까지,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공식지정작으로 나생문, 즉 라쇼몽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나는 시작한 다음날인 4월 1일날 보러 갔었는데 몇 번씩 매진행렬을 장식한 앵콜작 답게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라쇼몽이라는 소설이 연극이 되었다는 데 의문을 품었다. 50년대 작품인 영화 라쇼몽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내가 아는 라쇼몽은 소설 라쇼몽 뿐이었다. 하인과 노파 둘이서 나누는 대사가 전부인 이 소설을 연극으로 꾸민다?
하지만 보고나니 연극과 소설의 내용은 달랐다. 몇몇 캐릭터 속에 그 모습이 녹아있긴 했지만 인물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그 중심 주제는 같았지만, 연극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인지 스토리는 달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연극과 영화의 스토리가 같다고 한다. 그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등장인물로는 스님, 나무꾼, 가발장수, 산적 타조마루, 무사, 무사의 부인, 무녀가 등장한다. 어느 비오는 날, 스님과 나무꾼은 낡은 라쇼몽 안에서 침통한 얼굴로 비를 피하고 있다. 이때 등장한 가발장수. 그는 라쇼몽에 버려진 시체의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자이다. 나무꾼과 스님은 그것을 악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발장수는 위선을 떠는 인간보다 먹고 살기 위해 본능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자신이 옳다고 하며 다른 이들을 비웃는다. 그러다가 둘의 침통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들을 보챈다. 스님은 이날 있었던 재판 때문이라고 하며 그 내용을 말해 준다.
재판의 이유는 간단하다. 산적 타조마루가 지나가던 무사를 죽이고 그 부인을 겁탈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타조마루와 무사의 부인의 증언이 엇갈린데다, 무녀를 불러 들은 죽은 무사의 혼이 증언한 것마저도 그들의 말과 모두 엇갈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은 이 일을 기묘하게 생각하며 침통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열쇠는 그들의 곁에 있던 나무꾼이 쥐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이 사건 현장을 모두 목격했던 것이다. 나무꾼의 증언으로 나머지 세 사람은 다 제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해 뒤틀린 증언을 했다는 게 드러나고 사건은 일단락되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나무꾼이 저지른 악행이 드러나고 나무꾼만큼은 믿고 있었던 스님은 큰 충격을 받는다. 가발장수는 착한 척 위선을 떨었던 나무꾼을 비웃었고 나무꾼은 자책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그때, 그들은 버려진 한 아이를 발견하고 나무꾼은 그 아이를 잘 키움으로해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연극이 라쇼몽의 소설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희망을 주었다는 점이다. 어린아이. 이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로 인해 나무꾼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들은 혼탁한 세상 속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받는다.
라쇼몽은 분명 수작이다. 인간의 깊은 내면의 나약하고 어두운 면을 파헤쳤고 이것은 분명 인간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끝은 하인이 달아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였고 이를 읽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낄 것이다.
바로 이 부정적이고 희망이 없는 생각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닐까. 어두운 세상이라도, 인간들은 희망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조금이라도 따스한 이 연극의 결말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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