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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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 4.3사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작전과 소개민 심사, 이를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이 연일 이어졌다.
1949년이 되자 정부와 미국의 주한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함병선의 제2연대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대토벌을 더욱 강화하였다. 해 군에서는 18척의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선을 완전 봉쇄하고 37밀리 포로 함포사격을 가하였고, 공군에서는 L-4, L-5형 연락기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폭탄 투하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동시에 육군은 대전차포, 박격포, 0.5인치 기관총, 로케트포, M1 소총 등의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여 집단 학살과 무차별 방화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의 결과로 해안에서 4km 이상 떨어진 한라산에 오르는 부락은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학살을 피한 도민들은 삶을 찾아 다시 산으로, 해안의 안전지대로 도피해야 하는 운명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산민들
그러나 이들의 삶 또한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입산한 도민들은 여전히 토벌대의 추적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다시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라는 새로운 적과 직면하였던 것이다. 해안부락의 안전지대로 피신한 도민들 또한 형편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산 사람과 협력한 마을 사람'으로, 또는 '공산당 물이 들었다'고 많은 의심과 감시의 눈초리를 겪어 야 했으며, 끝내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소개된 마을 을 유격대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대대적인 축성 작업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민보단원이 되어 이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의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지속되는 대학살과 항쟁의 종식
제2연대의 육해공군 연합작전에도 불구하고 유격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정부 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지휘관:유재흥 대령, 참모장:함병선 중령)를 설치하고, 김용주 대령의 독립 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한다.
유재흥은 한편으로 3월 25일 기한의 사면계획을 발표하는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는 강력한 무장진압의 2단계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 결과 사면기간 동안 강경한 토벌작전에 대한 공포와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죽음 같은 삶을 벗어나려는 하산민의 두려움과 의구심 에 찬 투항이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회유, 고문, 협박 등을 통하여 유격대의 규모와 주둔 위치, 무장력 등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여전히 강경한 무장진압을 전개하던 유재흥 부대는 사면기간이 끝나자 즉각 대대적인 최후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동안 유재흥 부대는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였으며, 동 시에 3,600여 명의 유격대 동조자를 생포하였다. 이러한 전과는 당시 미군 비밀문서가 과장 집계 한 무장유격대의 숫자가 250여 명, 그리고 그 동조자의 숫자가 1,000~1,500명에 불과하였다는 것 에 비추어 볼 때, 유격대 색출을 빙자하여 도민에게 가해진 철저한 대토벌, 대학살을 반증하는 것 이었다. 즉 유재흥 부대는 '선무'라는 탈의 뒷면에 도민 대학살이라는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유격대 세력은 거의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폭 동이 종식되었음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대부분의 군경이 17일, 18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항쟁과 그것에 따른 피의 보복, 대살륙이 일단락되었다.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
그러나 학살은 이에 멈춘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도내 도처에서 소위 '전향 자' 에 대한 대검거 및 처형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경찰은 대정, 한경, 한림, 애월, 안덕, 중문, 서귀 등지에서 이전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양민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목 하에 소집하여 모슬포 송악산 부근 섯알오름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탄약고로 끌고 간 다음, 이들을 학살했다. 사망자 192명, 도민들은 뒷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를 조성하여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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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5.11.02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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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18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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